문학비평

다양한 빛깔의 향기로운 시들

권영상 2016. 8. 14. 13:40


다양한 빛깔의 향기로운 시들

권영상




지금은 지면에 발표되는 동시만도 수백 편에 달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의식이 깔려있는 이 시들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기에는 오히려 평을 하는 이의 안목과 능력이 미흡할 때를 많습니다. 그렇기에 시를 읽을 때면 시대의 무늬를 읽는 작품인가, 소재를 새롭거나 신선하게 구부리는가. 문학정신은 예리한가. 등을 고려합니다. 그렇게 선별한 시에 대해선 세세히 따지기 보다는 합당한 점을 찾거나, 가급적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입장에서 평을 하는 편입니다. 정확히 나의 눈이 아니라 작품을 생산한 그때 그 시인의 눈으로 그의 시를 바라보려 합니다.



지난 호까지는 발표된 동시들의 흐름을 짚어 일정한 주제를 바탕으로 평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시인데도 불구하고 주제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평의 대상에서 밀려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그 점이 늘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이번호에는 거기에서 좀 벗어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냥 시가 좋으면 주제와 상관없이 다루어보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작은 항목에서는 주제가 통일되어야할 것 같아 같은 유형끼리 억지 식으로 묶었음을 밝힙니다.



1. 과거의 학교, 현재의 학교


두 손 들고/ 교실 뒤에 섰는데// 빨개진 내 얼굴/ 자꾸/ 자꾸만/ 숙여/ 숙여지더니// 올라간 윗옷 아래// 까만/ 때/ 낀/ 내 배꼽과/ 만났습니다.

                                                                                             

                                                                         -이수경의 ‘벌서던 날’ 전문 <시와동화> 2016년 여름호



3학년 2학기, 영호의 발가락을 잘라먹었지. 그때부터 영호는 잘 걷지 못한다고 매일 선생님한테 구박을 받았어. // 4학년 봄이 지날 무렵, 선희의 오른쪽 팔을 먹어 치웠어. 손가락 몇 개를 떨어뜨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쓸모가 없었지. 왼팔을 바라보며 선희는 말했어. ‘이제부터 난 왼손잡이가 될 거야.’// 5학년, 새 학년이 시작됐을 때였어. 드디어 내 엉덩이도 괴물의 먹이가 되고 말았어. 그때부터 수학 시간이면 난 잠시도 의자에 앉아있질 못 했지. 엉덩이가 없었으니까. 후략.

                             

                                                                         -경종호의 ‘수학괴물’ 전문 <동시마중> 2016년 7.8월호



시의 내용상으로 보아 앞의 시는 꽤 오래된 과거의 교실 풍경이고, 아래의 시는 현재의 교실 풍경인 듯 합니다. 두 시 모두 녹록치 않은, 부정적인 교실 풍경입니다.


앞의 이수경의 시 ‘벌서던 날’은 4,50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지금도 정도만 다르지 어느 학교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김홍도가 그린 ‘서당’이란 그림에 가 닿아있는 듯 합니다. 숙제를 외지 못한 아이가 훈장님 앞에서 아이들 놀림을 받으며 울고 있습니다. 얼른 그치고 싶지만 아이들의 놀림이 너무 싫어 그치지도 못하고 우는 아이가 이 시 속에 나오는 ‘나’ 같습니다. 교실 뒤편에 가 손을 들고 있는 ‘나’에겐 걱정이 있습니다. 윗옷 밑에 빠끔 나와 있는 ‘때/낀/ 내 배꼽’입니다. 어린 ‘나’에겐 치명적인 놀림거리입니다. 시인은 고독한 이 에피소드를 일체의 감정을 거부한 채 ‘담담히 사실’만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일어날 ‘나’가 당할 놀림과 상처와 아픔과 눈물과 슬픔을 모두 독자 몫으로 슬그머니 미루어 놓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아래의 시, 경종호의 ‘수학괴물’의 배경은 수학시간입니다. 수학괴물은 3학년 2학기 때 영호의 발가락을 잘라 먹었고, 4학년 봄 무렵엔 선희의 오른쪽 팔을 먹었고, 5학년이 되자 드디어 괴물은 내 엉덩이를 먹어치웠습니다. 6학년이 된 지금도 수학괴물은 우리들 뒤에 서서 누군가의 뒤통수를, 갈비뼈를, 입을, 귀를 삼킬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수학괴물이 영호의 발가락을 잘라먹었다는 건 아니지요. 발가락이 아프다는 핑계로 수학공부를 피해보고 싶은 심리상태의 과장일 테지요. 수학이 든 날은 어디 다리라도 다쳐주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갈수록 공부 혐오에 대한 표현이 거칠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앞의 시가 자괴감에 빠진 ‘나’의 고독한 자기 고백적 시라면 아래의 시는 다중의 고통에 공감하는 ‘나’의 외부지향적 목소리의 시 같습니다.



2. 사랑과 사랑의 결핍


농협에서 나눠준/ 농사용 다이어리에// 또박또박/ 삐뚤빼뚤/ 빼곡한/ 외할머니 글씨.// 고랑에/ 씨앗 뿌리듯/ 정성들여 쓰신 일기.// 살며시 들여다본/ 색다른 그 일기장에/ 갈피마다/ 엄마 이름/ 사이사이 내 이름/ 모판에/ 나부끼고 있는/ 파릇한 모들처럼.

                 

                                                                 -조두현의 ‘색다른 일기장’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6년 여름호



배고프다 하모 밥 차려주제./ 꿍쳐 둔 돈 몽땅 빼 주제./ 신발이고 옷은 다 메이커제. 부족한 게 뭐꼬?/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해라는 말이/ 뭐가 못마땅해서/ 어디로 토까이 맹키로 토꼈다가/ 꼬내기 맹키로 살짝이/ 들어오면 어야노?/ 니마저 없아모 어째 살겠노?/ 이 할미는 속 타 죽겠다마! 이불만 뒤집어 쓰지 말고/ 말 좀 해 봐라./ 간이라도 빼 주꾸마!/ 니사 엄마만 없다 뿐이지./ 모가 부족하노?

             

                                                             -박해정의 ‘뭐가 부족하노?’ 전문 <어린이책이야기> 2016년 여름호



두 시 모두 육친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점은 다르네요. 앞의 시는 세상 물정을 좀 아는 ‘나’가 외할머니를 바라보는 시점이고, 아래 시는 손자를 키우고 있는 할머니가 자신의 손자 ‘니’를 바라보는 시점이군요.




앞의 시 조두현의 ‘색다른 일기장’은 시골에서 홀로 농사일을 하시는 외할머니의 농사용 ‘다이어리’를 통해 외할머니의 자식을 향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시조입니다. 시조라는 제한된 형식 때문인지 육친간의 그리움이나 사랑에 대한 감정이 다량 배제된, 약간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외할머니의 글씨를 고랑에 뿌린 ‘씨앗’에 비유하거나 엄마와 내 이름을 모판에 나부끼고 있는 ‘파릇한 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비유가 독특합니다. ‘씨앗’과 ‘모’는 외할머니가 정성껏 뿌리고 가꾼 외할머니의 ‘모든 것’입니다. 시인은,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닳고 닳은 말을 버리고 이 외할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엄마와 나에 대한 사랑을 에둘러 말합니다. 그러니까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자가 시를 잠시만이라도 더 붙들고 있도록 하는 시간성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시, 박해정의 ‘뭐가 부족하노?’는 위의 시와 달리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마음에 맺힌 것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목소리가 꽤 큰 동시네요. 엄마 없는 손자를 돌보며 사는 경상도 할매의 속 태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밥 먹여주고, 돈 주고, 옷 입혀주는 할머니 입장에서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해라는 말’ 못 할 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만 그 말로 손자와 불통을 하고 사네요. 답답하겠지요. 소통의 방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살아온 할머니에겐 오히려 말 하지 않는 손자가 밉지요. 그러나 손자는 손자대로 그런 할머니가 싫습니다. 엄마가 있을 때라면 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지금 손자인 ‘니’에겐 엄마가 없습니다. 모성 결핍이 대화를 거부하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시인은 아무리 좋은 밥도, 돈도, 값비싼 신발도 엄마만 못하다는 걸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네요.



3. 행복을 가져다주는 손



이웃집 지하에 세 들어 사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태풍에 비바람 세찬 날 아침/ 할머니는 떨어진 감알을 주워/ 상자에 담으신다./ 붙어서 살지 못하고 왜 떨어졌노! 라고 하시며/ 깊옆 담장 넘어진 분꽃 대궁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꽂아 기대게 하신다./ 그리고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신다./ 우리들 모두의 삶이 위태롭지 않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고 하셨다.

                           

                                                                                -이창건의 ‘태풍’ 전문 <아동문학세상> 2016년 여름호



썰물이 질 때,/ 바닷물 저 혼자 쑥 나가지 않는다./ 갯마을 골목길 갯고랑으로 잘방잘방 망둥어 데려 나가고/ 잠자는 엽낭게 깨우며 간다./ 걸음이 느린 민챙이 밤게들 집까지 바래 주고 간다.// 밀물이 들 때,/ 대문을 쿵 차듯 바닷물 저 혼자 들어오지 않는다./ 민물도요 댕가기 세가락도요 발자국 따라/ 갯마을 골목길 갯고랑으로 가무락가무락 들어온다./ 콩게네 쏭 쏭 방게네 쏭 쏭 쏭 함께 혼다.

                   

                                                                -조무호의 ‘을숙도 갯벌’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6년 여름호




앞의 시는 누군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이가 있으므로 얻는 행복이고, 아래의 시는 동행을 통한 행복이 엿보입니다.

이창건의 시 ‘태풍’에선 이웃 할머니의 세상에 대한 기도소리가 조용히 울려나옵니다. 할머니는 태풍 지나간 날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주워들고 왜 가지에 붙어살지 못하고 떨어졌냐고 마치 부모 곁을 뛰쳐나온 아이를 감싸안으며 탓하듯 탓합니다. 담장 곁에 쓰러진 분꽃을 일으켜 세워주면서 하늘에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위태롭지 않게 해달라고. 이렇게 우리 사는 일상을 걱정하는 이 할머니는 또 어떤 분이시냐? 이웃집 ‘지하에 세 들어사는’ 분입니다. 그분이 다들 모른 체 하며 지나갈 일에 이토록 나의 일처럼 마치 누군가에게 항변하듯 마음 아프게 기도해줍니다. 떨어진 감을 위해, 쓰러진 분꽃을 위해 기도하는 듯 하지만 어찌보면 할머니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항변 같기도 해 읽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 무심한 세상에 우리를 위해 이처럼 기도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고, 또 그래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조무호의 ‘을숙도 갯벌’은 큰손(바닷물)의 동행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네요. 썰물이 질 때에 보면 바닷물은 저 혼자 쑥 나가지 않지요. 망둥어를 데리고 나가지요. 엽낭게를 깨우며 가지요. 밤게들을 집까지 바래다주며 가지요. 밀물이 들 때에 보면 콩게며 방게며 다 데리고 함께 들어옵니다. 그래서 을숙도 갯벌은 늘 평온하고, 작은 것들이 큰것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도 아무런 고충이 없는 공간입니다. 세상 어디에나 힘 있는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그 세상이 살만한 것은 서로 보살펴주며 공생하려는 마음의 도덕이 내면에 숨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4. 전쟁 없는 세상



휴전선의 꽃들은/ 지뢰를 밟고 꽃을 피운다.// 그래, 지뢰가 터지듯/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휴전선의 나무들은/ 발아래 지뢰를 밟고 잎을 피운다.// 그래, 지뢰를 밟아/ 발목이 잘려나간 짐승처럼/ 붉은 열매를 가지에 아프게 매단다.// 그래그래, 휴전선의 새들은/ 꽃과 나무들의 열매를 따먹고/ 지뢰가 없는 땅으로 옮겨준다.// -끙!/ 하고…….

        

                                                      -김진광의 ‘휴전선의 꽃과 나무와 새’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6년 여름호



선물 받은 책 한 권으로/ 세상 아이들과/ 만났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 쓰레기더미 속에 사는 아이들./ 전쟁터로 내몰린 아이들.// 오늘은 어린이날인데.......// 그 아이,/ 밥은 먹었을까?/ 선물은 받았을까?/ 손에 든 총은 내려놨을까?// 혹시라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커지는 걱정.

                  

                                                                      -정진아의 ‘슬픈 어린이날’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6년 7월호



두 시 모두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의 시, 김진광의 ‘휴전선의 꽃과 나무와 새’의 공간은 휴전선이네요. 전쟁이 그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시인은 휴전선 앞에서 아직도 고통에 떠는 전쟁 이후의 숨겨진 상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흔적들이 꽃과 나무숲에 뒤덮여 사라진 듯 하지만 시인은 꽃대가 밟고 서 있는 발밑과 굳건히 서 있는 듯한 나무들의 발밑을 놓치지 않고 들여다봅니다. 그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를 지뢰를 밟고 서 있습니다. 그러기에 들풀이 지금 피우고 있는 꽃은 시인에게 눈물과 상처의 꽃이고, 나무들이 피운 잎은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잎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바라보는 휴전선의 수림은 시인에게 통곡하는 울음의 물결로 보입니다.

휴전선에 사는 들풀이라고 사람과 다를까요. 다음 세상에서만은 전쟁의 상처 없는 곳에서 살기를 바라겠지요. 이제 그 소망을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닌 새들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따먹고 멀리멀리 지뢰가 없는 땅으로 옮겨주고 있습니다.



아래의 시 정진아의 ‘슬픈 어린이날’은 선물 받은 책속에서 만난, 모르기는 해도 아프리카 어느 나라 아이들이 중심소재입니다. 태어나 보니 내전으로 고통 받는 나라입니다. 태어나 보니 굶주려야 하고, 쓰레기더미를 뒤져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그 아이들의 나라입니다. 어린이날, 푸짐한 선물을 받고, 놀이공원에 가고, 하루 종일 원하는 대로 노는 이쪽의 아이들과 달리 손에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그쪽 아이들을 화자는 걱정하고 있습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누군가가 불행에 빠져있는 한 나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불행이 다른 얼굴로 곧 내게 닥쳐오는 그런 세상에 지금 우리는 놓여있습니다. ‘손에 든 총은 내려놨을까?’ 하는 시속 화자의 걱정에 괜히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누그러들 기미가 없는 폭염 앞에서도 맥없이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동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여기 언급된 동시들 말고도 짝이 맞지 않아 밀려난 작품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박방희의 ‘저녁별’이고, 또 하나는 차영미의 ‘강들은 모두’입니다. ‘저녁별’엔 시인의 산뜻한 감수성이, ‘강들은 모두’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얼싸안을 수 있는 강물과 바닷물의 초연한 포옹이 빛났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아동문학평론 2016년 가을호 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