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화해
<동시 계절평>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화해
권영상
겨울이 물러가고 또 어디쯤에서 기다리고 있던 봄이 왔다. 봄은 갇혀있던 우리의 시선을 다양하게 열어준다.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 시선이란 열려있을 때보다 닫혀있을 때 더욱 깊어지거나 진지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은 닫힌 세상에 존재하는 틈을 본다. 그의 눈은 전체를 보면서 동시에 전체와 호응하지 못하는 틈을 향한다. 시인의 눈은 자신이 발견한 그 작은 틈을 앞에 놓고 세계를 보거나 해석하려 한다. 틈이란 무언가. 모순이거나, 부조리이거나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이거나 거기 존재하는 모든 삐뚤어진 것들이다. 장폴 사르트르는 이것들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나를 바라보는 타자들’이라 말한다.
세상은 나와 타자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나와 타자가 서로 관계하며 존재한다. 그 두 관계가 공존하기 위해 예술이 태어났을 것이라는 나의 유추는 지나친 것일까. 예술이란 타자에 대한 인간의 관심에서 태어났다고 봄이 옳겠다. 특히나 문학은 더욱 타자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예술이다.
이번호엔 시인의 시선이 가 닿는 틈과 거기에 비추어지는 타자에 대한 시인의 아픔과 사랑과 연민 또는 고통을 넘어서는 화해와 용서의 구조를 가진 시들이 여럿 보였다.
1. 아빠라는 존재의 비밀
아빠 신발 앞쪽엔 쇠가 박혀 있다/ 다섯 발가락 지켜주기 위해/일 톤 무게에도 견디는 무쇠가 박혀있다// 아빠는 일요일에도 일 나간다/ 다섯 발가락 우리 가족 지켜주기 위해/영하 십삼 도 메가톤 추위도 견디는/우리 아빠 무쇠 아빠/ 눈보라 뚫고 공사장 간다
-곽해룡의 ‘안전화’ 전문 <동시마중> 2016년 1․ 2월호
일주일에 한두 번 늦은 밤, 우리 집에는 얼굴이 붉은 도깨비가 온다.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발걸음 비틀비틀, 콧김도 킁킁, 손에는 도깨비 방망이 대신 나와 내 동생이 좋아하는 피자나 통닭을 얼렁덜렁 들었다. 주먹으로 현관문을 쿵쾅쿵쾅 치면서 우쭐우쭐 들어선다. 붉은 도깨비가 무서워하는 게 딱 하나 있다. 우리 엄마다. 붉은 도깨비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날은 엄마는 도깨비보다 더 큰 뿔을 머리에 달고, 두 눈은 번쩍번쩍 날카로운 쌍도끼가 된다. 붉은 도깨비가 엄마 앞에서 중얼중얼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다가도 엄마가 꽥 하고 내지르는 기차 화통소리에 후다닥, 안방 이불 밑으로 숨어버린다.// 도깨비가 다녀 간 아침이면, 아빠는 붉은 도깨비가 좋아한다는, 그 맵고 뜨거운 북엇국을 불평 한 마디 없이 꾸역꾸역 넘기신다.
-고광근의 ‘우리 집에는 붉은 도깨비가 온다’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6년 겨울호
위 두 시 모두 아빠를 중심소재로 하고 있다. 그 중심소재인 아빠가 이 시에 있어서 타자이기도 하다.
곽해룡 시의 아빠에겐 그 존재의 비밀이 있다. 발가락을 지켜주기 위해 신발 앞쪽에 박아놓은 ‘무쇠’다. 일 톤 무게에도 견뎌내는 그 무쇠의 비밀이란 다름 아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하 십삼 도 메가톤 추위에도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짐이다. 아빠는 그나마 그 짐의 무게가 있어 가족 내의 무쇠 아빠로 존재한다. 시인은 그런 아빠를 감싸주고 싶다. ‘눈보라 뚫고 공사장 간다.’는 진술로 아픈 연민을 보낸다.
고광근 시의 아빠는 나약한 붉은 도깨비다. 도깨비가 술 마신 날은 가끔 ‘피자나 통닭’을 들고 늦은 밤에 귀가한다. 어쩌면 그도 자식들 앞에서 우쭐거리며 아빠 노릇을 해보고 싶다. 그런 아빠지만 그에게는 무서운 ‘뿔 달린 ‘엄마’가 있다. 엄마가 쌍도끼 눈을 뜨며 소리치면 붉은 도깨비는 가엽게도 안방 이불 밑으로 숨어버린다. 아빠는 그런 존재다. 다음 날 아침이면 엄마가 해주는 북엇국이나 꾸역꾸역 먹는 허울 좋은 존재다. 이것이 아빠 속에 숨어있는 왜소하고 힘없는 모습이며 시인의 연민이기도 하다.
2. 타자에 대해 거리 두고 보기
풀 한 포기가/ 푸들푸들/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에/ 밟힌 모양이다.// 푸들,/ 푸들,/ 푸들,//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풀 한 포기//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풀 한 포기// 온 세상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공재동의 ‘풀 한 포기’ 전문 <동시마중> 2016년 1․ 2월호
눈이 내리네/ 거위의 보드라운 털처럼/ 바람 속에 날리네/ 하늘하늘 내리네// 찬바람 이는 들과 산// 겨울잠을 자는/ 여린 벌레들과/ 씨앗들/ 포근한 잠을 위해// 하늘은/ 아프게 제 털을 뽑아/ 들과 산에 내려 보내네/ 포근한/ 거위털 이불이 되게 하네.
-하청호의 ‘눈과 거위털 이불’ 전문 <시와 동화> 2016년 겨울호
공재동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시선은 ‘풀 한 포기’에 꽂혀 있다. 무심한 누군가의 발길에 짓밟힌 풀이다. 풀은 아픈 허리를 펴고 일어나려 푸들푸들 몸짓을 한다. 하필이면 시인은 이 넓은 들판에서 누군가의 억압에 짓눌린 ‘풀 한 포기’라는 틈을 발견한다. 시인은 그렇게 발견된 틈 하나를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하게 짓밟히는 약자의 아픔을 말한다.
앞의 시들과 달리 시인은 이 약자를 향해 객관적인 거리, 곧 ‘온 세상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자칫 대상에 대한 감정의 과잉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청호의 시에서 시인이 보내는 눈길은 ‘여린 벌레들과/씨앗들’에 가 있다. 그들은 눈 내리는 냉혹한 추위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타자들이다. 시인의 시선 끝에 놓인, 이 떨고 있는 타자들을 향해 보내야하는 시인의 사랑이란 어떠해야할까. 진부함일까 속됨일까.
이 시에서도 시인은 시 속에 끼어드는 일을 삼간다. 3인칭 전지적 입장에서 타자를 응시할 뿐이다. ‘아프게 제 털을 뽑아’ 여린 벌레들과 씨앗들의 거위털이불이 되게 한다는 방식으로 감정 노출을 가급적 억제하고 있다.
3. 타자애에 대한 보상
겨울이 왔다/ 강아지에게 옷을 입혔다/ 내가 입던 옷/ 설날에 엄마가 사준 옷을 입혔다/ 어딘가에 있을/ 강아지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호승의 ‘강아지 옷’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6년 겨울호
엄마가 끓인 냉잇국/ 향이/ 소-올-소-올/ 빠져나가더니/ 이웃집 할머니를/ 모시고 왔어요.// ‘냉잇국 끓였구나!’
-남석우의 ‘냉잇국’ 전문 <시와 동화> 2016년 겨울호
정호승 시에 겨울이 왔다. 겨울이란 결핍된 이들에겐 고통의 계절이다. 그때에 시인은 맨몸뚱이로 겨울을 나기에 힘든 강아지를 본다. 그것은 마치 싯다르타가 발가벗다시피한 농부의 여윈 몸과 삶의 고통을 보는 순간을 연상시킨다. 싯다르타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 듯 시인은 강아지에게 옷을 입힌다. 그 옷이란 엄마가 내게 사주신 내 체취가 고스란히 묻은 옷이다. 그 옷을 강아지에게 입힌다는 것은 강아지를 자신과 동등하게 보는 사랑 때문이다.
그의 시에 인간을 넘어 다른 생명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나아가 연민하는 또 다른 타자가 있다.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지 모를 강아지 엄마다. 이때를 위하여 장폴 사르트르가 말했다. 타자란 원칙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자다. 여기에 타자애의 윤리가 있다.
남석우의 엄마가 끓인 ‘냉잇국’엔 냉잇국 향이 있다. 시인은 이 보이지 않는 후각체에 시선을 보낸다. 냉잇국 향은 문틈으로 빠져나가 이웃집 할머니를 모시고 온다. 할머니가 스스로 향을 따라오셨거나 화자가 모셔온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배경엔 노약자에 대한 공경과 연민이 깔려 있다. ‘냉잇국 끓였구나!’ 이 시의 핵심은 할머니의 이 짧은 한 마디다. 이 한 마디 말 속에 배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과 깊은 인간적 관계가 모두 깃들어 있다. 이처럼 타자를 사랑하는 일이란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나는 타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4. 아픔을 용서와 화해로
“통일 조국이 뭐예요?/ 할아버지.”// 통일 조국이란/ 목포에서 나진까지 기차를 탈 수 있는 나라다./ 기차를 타고 앉아 나눠진 때를 얘기하는 나라지./ “그거 없었던 역사로 하세.” 그 말하는 나라야.// 제주에서 용암포까지 배를 타는 나라다. 배를 타고 앉아 나눠진 때를 얘기하는 나라지./ “그거 없었던 역사로 하세.” 그 말하는 나라야.//
중략,
“얼마나 좋으냐,/ 할아버지가 물려주신다는/ 통일 조국!”
-신현득의 ‘통일 조국’ 앞과 뒷부분 <시와 동화> 2016년 겨울호
농약 안 치고 고추 농사짓는다고?/ 비닐도 안 씌우고 고구마 농사가 잘 될까? /방울토마토만 한 미니 사과를 누가 사 먹을꼬?/ 수경재배로 딸기를 우째 키우노?// 동네 할아버지들이 보기에/ 이상한 방법으로만 농사짓는 정필규 아저씨// “농사는 뭐라 캐도 연륜인데.....”/ “어른들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카는데.”/ “저래 답답해서 입에 풀칠이나 하겠나”/ “그래도 도전 정신 하나는 참말로 대단테이”//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리는 아저씨 별명/ 정. 도. 전.
-송명원의 ‘우리 동네 정도전’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6년 겨울호
신현득의 시 ‘통일 조국’엔 장엄한 서사적 냄새가 난다. 시인의 시선은 아픔 많았던 통일 조국에 가 있다. 통일 조국은 그 동안 정치적 이유로 우리의 삶 밖에 놓였다가 또 안에 놓였다가한 곡절 많은 대상이다.
조국이란 얼마나 가엾은 존재이냐 하면 같은 나라이면서도 기찻길이 막혀있고, 뱃길이 막혀있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없는 60여 년이라는 긴 단절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거기엔 이산의 아픔뿐 아니라 불완전한 영토의 아픔도 있었다. 시인은 조국이 통일 된다면 그 아픔쯤은 ‘없었던 역사로 하’자고 한다. 그것은 그 동안 조국이 겪은 고통과 슬픔과 비애를 일순간 용서와 화해로 바꾸어버리겠다는 너그러움의 표현이다. 또한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며, 동시에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다.
송명원 시에서 시인의 시선은 동네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야유를 받고 있는 ‘정필규 아저씨’에 가 있다. 정필규 아저씨는 그런 면에서 약자이며 외톨이다. 뭔가 다 잘 아는 척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잘 아는 사람이 항상 배척당하거나 무시당한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인 부조리 속에서도 시인만이 발견하는 그만의 약자에 대한 관심 있다. ‘도전 정신 하나는 참으로 대단테이’다. 이게 시인이 정필규 아저씨에게 보내는 타자애다.
타인에게 아픔을 안기거나 타인의 마음을 할퀴며 살아가는 일이 마치 생존을 위한 숙명인 양 받아들이는 세태가 우리에겐 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인간만의 것인 양 자신을 제외한 타자들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런 세상에서 타자를 향해, 그러니까 약자나 다른 생명체, 그리고 핍진한 조국에게까지 애정어린 시선을 보인 시인들이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제나 힘겹지만 그래서 세상은 시인들로 하여 또다시 살만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2016년 아동문학평론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