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오붓했던 과거, 화투 한 목

권영상 2016. 1. 23. 18:41

오붓했던 과거, 화투 한 목

권영상

     

   

 

책 둘 곳이 마땅찮아 책장 앞에 쌓아둔지 오래 됐다. 혹시 편지봉투를 떼는 페이퍼나이프가 거기 책장서랍에 있을까 싶어 간신히 책을 밀어내고 서랍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금속 손잡이가 쑥 빠졌다. 어린아이 어르듯 달래어 서랍을 열었다.

 

 

 

까맣게 잊고 살던 소소한 것들이 불쑥 나타났다. 대체 무엇에 쓰려던 건지 노란 찰고무줄 타래가 나왔다. 돌돌 말린 줄자며 지포 라이터, 그 옛날 어머니가 쓰시던 검정 가위, 그리고 그 아래에 몇 장 떼어쓴 두꺼운 원고지 두 묶음이 나왔다. 원고지에 글을 써 보내던 때가 20년은 된 듯하다그러고 보면 이 책장 서랍 속의 물건들도 그 무렵의 것들이지 싶다.

 

 

 

내 기억에서 사라졌던 과거의 조각들이다. 대체 내 머리가 왜 이러지? 하며 한탄하던 기억들이 여기 와 기억창고를 만들고 있었다. 소중한 것이든 아니든 한 때 나와 함께 살던 것들이다. 그동안 나는 여기 이 과거들과 소통 없이 산 셈이다. 내가 찾는 케냐산 페이퍼나이프는 거기에 없었다.

 

 

 

뜻밖에도 나는 거기에서 화투 한 목을 발견했다.

지금은 다 커버린 딸아이의 어릴 적 과거 한 조각을 만나는 것 같아 반가웠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다. 설 명절을 쇠러 시골 어머니를 뵈러 갔었는데, 그때 거기서 제 손위 사촌들한테 화투치는 법을 배웠다.

아빠, 화투 쳐.”

명절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딸아이가 화투 한목을 내 앞에 내놓았다. 동네 문방구에서 샀다는 거다. 나는 망설였다. 함께 쳐, 말어, 짧은 순간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때 전 국민이 가지고 놀던 놀이였으니까 이 화투 속에 전 국민의 정서가 들어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딸아이와 마주 앉아 민화투를 쳤다. 늦은 저녁엔 아내와 셋이서 쳤다. 언제부터 내기화투를 했다. 아이스크림 내기도 하고, 지는 사람이 호빵 사오기 내기도 했다. 가족끼리 하는 화투여도 지기보단 서로 이기려했다. 여러 판 끝에 결국 딸아이가 꼴찌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3학년밖에 되지 않은 딸아이를 혼자 밤길에 내보낼 수 없어 옷을 잔뜩 껴입고 함께 나갔다. 늦은 겨울밤의 골목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한길에서 딸아이와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며 눈에 띄는 불 켜진 가게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렸다. 호빵을 사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올 때는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그때 호빵을 품에 안고 돌아오며 딸아이가 말했다.

아빠, 지니까 이렇게 좋은 걸. 멀리까지 갔다 오고.”

그러니까 그때 딸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화투를 통해 지는 일이 이기는 일보다 즐겁다는 걸 알게 모르게 배웠던 셈이다.

 

 

 

우연히 발견한 화투 한 목 속에는 다시 생각해도 괜찮은 한겨울의 과거가 숨어있었다. 아니 오래된 미래가 숨어있었다. 그때 어린 딸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딸아이의 미래를 점쳤을지 모른다. 딸아이는 지금도 이기려고 바둥대지 않는다. 부지런할 뿐.

저녁에 시간이 나면 아내와 화투 한 판을 쳐야겠다. 화투 한 목 속에 숨어있는 오붓했던 과거를 살려내고 싶다. 아내가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나도 딸아이처럼 몇 번 져주어야겠다. 근데 그 일이 말처럼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