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한 발 물러서는 일

권영상 2016. 1. 16. 17:53

한 발 물러서는 일

권영상

 

 

 

 

“난꽃이 폈어요.”

베란다에 나갔다온 아내가 그런다. 파 한 뿌리가 손에 들려있다. 아내는 작은 변화에도 눈이 밝다. ‘네 번째 화분에!’ 하며 아침 준비를 하러 간다. 네 번째 화분이라면 호금조 조롱 곁에 있는 화분이다. 호금조들이 놀랄까봐 가만가만 그 네 번째 화분에 다가갔다. 두 개의 꽃대 끝에 꽃과 꽃망울이 물려있다. 허리를 숙여 코를 댄다. 향이 차고 은은하다.

 

 

 

창가에 놓아둔 난초화분은 모두 다섯이다. 우리 집에 온지 7,8년 많게는 10년도 더 넘는 화분들이다. 우리 집에 찾아온 이 다섯 개의 난은 특별히 마음 써준 적도 없는데 해마다 깨끗한 꽃을 피운다. 베란다엔 그들 말고 다른 화분들도 꽤 여럿 있다. 행복나무며 관음죽, 향수나무 등의 나무류와 허브며 선인장화분까지. 그러니까 다섯 개의 난화분도 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점점 사는 일이 바쁘다 보니 전과 달리 화분에 매달려 살지 못한다.

 

 

 

그런데도 겨울눈이 펑펑 내릴 때쯤에 보면 어김없이 난이 깨끗한 꽃을 피워 우리를 즐겁게 한다. 겨울만이 아니다. 지리하게 내리는 장맛비에 우리가 지칠 때에도 숲에서 몰래 피는 야생화들처럼 어느 날 창가 화분들 틈에서 맑은 꽃향기를 풍긴다.

“화분에서 한 발짝 물러서야 난은 꽃을 피운다.”

이 말은 몇 안 되는 난화분을 키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어리석은 우리부부가 그런 경험을 얻는데는 실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나름대로 꽤 큰돈을 내고 난 두 분을 샀다. 기왕이면 우리 손으로 꽃을 피워 오래 볼 욕심에 꽃이 덜 핀 난을 샀다. 신비디움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 꽃몽오리가 툭툭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물이 부족한 줄 알고 물을 주다가, 오히려 지나친 수분공급이 원인이라기에 헤어드라이어로 화분을 말리다가, 가습기로 수증기를 뿜어주며 금이야 옥이야 돌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우리는 꽃도 못 피워본 채 그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난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때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

신비디움만큼 귀한 자식이었다. 귀한 자식이라 남들처럼 잘 키워보려고 우리는 그 애 인생에 끼어들었다. 남들이 다닌다는 학원이며, 남들이 다니지 않는 학원까지 보냈다. 그때 딸아이는 공부에 치여 살았다. 가장 공부에 지치던 때가 유학하여 대학을 다니던 5년이었다. 우리는 그 무렵, 값비싼 신비디움을 잃고도 생명에 대한 과욕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몰랐다. 아내나 나나 그 때는 젊었으니 무모할 만큼 자식에 대한 욕심이 컸다.

 

 

 

힘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아이에겐 유학 후유증이 있었다. 부모인 우리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었다. 우리는 한 동안 삶의 의욕을 잃었다. 베란다에 둔 난 화분들도 버려두다시피 방치했다. 그런데 그 버려둔 화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도 피지 않던 난꽃이 피지 않는가. 우리는 그 때 그 경이로운 생명현상에 잃었던 의욕을 되찾았다.

“그래. 서로 한 발씩 물러서자.”

소중한 생명일수록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은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봐주는 일이다. 그럴 때 생명은 제 힘으로 일어나 제 몸에 맞는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베란다에 들여온 난을 키워보며 그 이치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