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갈고양이의 모정
벵갈고양이의 모정
권영상
집 앞 김형네 밭에 옥수수가 키 넘도록 크고, 늦게 심은 참깨가 멀칭한 구멍 속을 막 빠져나오고 있다. 나는 그들 밭과 붙어 있는 집옆 텃밭에 자주 나간다. 거기 마늘이 크고 있고, 12포기 심어놓은 토마토가 한창 크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반찬거리 애호박이며 상추가 크고 있다. 그러니 풀방구리 드나들듯 텃밭을 들락인다.
오늘 토마토 줄기를 비닐끈으로 묶어주고 있을 때다. 고양이 한 놈이 소리 없이 내 곁을 슬쩍 지나갔다. 표범무늬다. 그는 긴 꼬리로 내 엉덩이를 툭 후려치고 가려했는데 가여워서 그냥 간다는 식으로 어슬렁어슬렁 갔다. 다른 고양이도 아닌 표범무늬 벵갈고양이다. 덩치 큰 장년의 벵갈이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보내며 상추와 마늘밭 사이를 조용히 지날 때 나는 일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놈의 자슥!”
나는 공포를 떨쳐내듯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들고 있던 비닐 끈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런 나의 모습이 좀 가소로웠을까. 벵갈이 걸음을 뚝 멈추더니, 한 순간 침묵을 던져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 몸이 갑자기 긴장했다. 그런 나의 긴장감을 느꼈는지 벵갈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어가더니 날 들으라는 듯 이야아옹! 한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여기가 내 영토인데 넌 대체 누구냐? 내 귀에 그 울음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몸이 소름이 훅 돋았다.
그러고는 볼일을 마친 표범처럼 이윽고 바위울타리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저 녀석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 몇 번 본 적 있는 구면이다. 음식물 찌꺼기를 텃밭에 묻고 다음 날에 가보면 어김없이 파헤쳐져 있었다. 그 일이 있은지는 벌써 여러 날이다. 모르기는 해도 벵갈의 소행이 분명했다. 한 번도 그가 파헤치는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용의자는 분명 저 놈이었다. 갈색 바탕에 검은 점 얼룩무늬가 있는 파란 눈의 벵갈 고양이.
늦은 밤, 어쩌다 창문 밖을 내다보면 가끔 벵갈이 잔디마당을 소리 없이 지나가곤 했다. 그는 마치 이 율곡리 25번지 일대를 지배하는 제왕이기나 한 것처럼 카리스마가 있었다. 내 방에서 쏟아져 나가는 불빛조차 자신의 발로 제압하며 지나간다는 듯 벵갈은 내가 가진 이 마당과 이 불빛을 자신의 발아래에 놓으려 했다.
“덱! 이놈의 벵갈!”
나는 기껏 주먹을 들어 을러메곤 했다.
그러면 그는 나를 슬쩍 곁눈질 한다. 어쩌면 그는 내가 저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게 표범무늬 벵갈고양이의 본성이나 아닌지. 그는 단지 야아옹, 그 한번의 울음을 내놓고는 가버린다.
내가 벵갈을 욕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저의 제국을 순시하듯 우리 마당을 고요히 지나가기만 하는 게 아니다. 꼭 흔적을 남긴다. 똥이다. 똥을 한 무더기씩 누어놓고 간다. 그것도 내 눈에 잘 띄는 마당 한 가운데나 아니면 내 창문 앞이 그 자리다. 내 눈에는 몹시 거슬렸지만 그에게는 여기는 자신의 영토이며 나는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자신의 한 신민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내가 암만 을러박지르고 소리쳐도 그는 이미 나를 그렇게 규정해놓은 게 분명했다.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소리 없이 내 등 뒤에서 나타나 내 곁을 지나가는 방식으로 나를 겁박하곤 했다. 그러니 내가 벵갈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근데 저녁 무렵에 상추 한 잎을 따러 텃밭에 나갔을 때다. 나는 진기한 광경을 거기서 목도했다. 병아리만한 고양이 새끼가 바위울타리를 타고 있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아니 또 한 마리. 네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집 뒤 배수로에서 나와 바위울타리를 타고 있는 게 아닌가. 실뭉치처럼 예쁘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들이었다. 나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자 새끼 고양이들이 바위울타리에서 내려와 모두 배수로로 사라졌다.
나는 얼른 배수로를 들여다봤지만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한 발 물러서려는데 고양이 새끼들이 장난치듯 작은 구멍 속에서 할끔할끔 고개를 내밀더니 나를 보자 장난치듯 이내 쏙쏙 숨었다. 나는 그들이 숨어든 곳을 살폈다. 그제야 알았다. 그 구멍이란 땅에 묻혀 배수로로 빠져나오는 우리집 낙숫물 홈통이었다. 그 홈통 속이 그들의 은신처였다. 아니 거기서 어느 고양이란 놈이 새끼를 낳고 키웠던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어디쯤 나를 지켜보고 있을 어미를 찾았다. 저쪽 김형네집 바위울타리 위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 한 놈이 있었다. 벵갈고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벵갈이 이들의 어미였다. 그가 여태 협박하듯 나를 위협한 건 어쩌면 이들 새끼를 지키기 위한 사전 제스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배수로 낙숫물 홈통에 가 보았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새끼고양이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보금자리를 들켰다고 판단한 벵갈이 새끼들을 데리고 피신해버린 듯 했다.
나는 좀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 나오다 뜻밖에도 그들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김형네 콩모종 모판 위에 쳐놓은 검정 햇빛 차양막 위에 올라가 제 집처럼 놀고 있었다. 다섯 마리가 아니고 여섯 마리였다. 여섯 마리 새끼 고양이가 그 위 올라가 강종강종 뛰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다가, 차양막에 매달렸다가 하며 재미나게 놀고 있었다. 나는 그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넋을 놓고 보다가 내 등 뒤가 섬뜩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등 뒤에 벵갈이 와 있었다. 나는 경박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어흠, 했다. 그러며 슬쩍 내 등뒤로 눈길을 보냈다. 벵갈이 내 왼발 아래로 걸어와 발 앞에 납죽 엎드렸다. 내 왼발이 속으로 떨고 있었다. 야아옹, 벵갈이 낮은 소리로 울었다. 안녕하세요? 내 귀에 그렇게 들렸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벵갈 쪽으로 돌아섰다. 그가 제왕답지 않게 강중강중 내 발 주변을 돌더니 마치 내 발을 숭배하겠다는 듯 다시 엎드려 내 발에 코를 댔다. 나는 그 예전의 벵갈이 하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 후부터 날카롭기만 하던 벵갈도 전처럼 대놓고 나를 겁박하거나 마당에 똥을 누는 일을 삼가고 있다. 제 새끼를 지키기 위해 나와 대결하는 걸 피하는 듯 했다. 그게 여섯 마리의 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버거운 어미의 굴욕이 아닌가 싶었다. 가족을 위해 세상에 굴종하며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질 무렵에 보니 새끼 고양이 여섯 마리가 김형네 옥수수밭 이랑에서 강종거리며 뛰어다닌다. 그들의 앞날이 그저 순탄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