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풍부한 나라
상상력이 풍부한 나라
권영상
그들은 마법의 부름을 받고 나니아로 간다. 그들이 나니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니아는 그들이 통치하던 때의 평화로운 나니아가 아니다. 텔마린 족에게 점령당해 무자비한 미라즈 왕의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페벤시의 남매가 영국으로 돌아온 건 분명 1년이 지났지만 나니아에는 이미 13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페벤시의 남매를 불러낸 건 누구인가. 텔마린 족의 진정한 왕위 계승자인 선왕의 아들이자 미라즈 왕의 조카인 캐스피언 왕자다. 삼촌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느낀 왕자는 나니아인들이 숨어사는 숲에서 그들을 부른 것이다. 왕자는 또 나니아인들에게 자신의 왕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삶의 터전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삼촌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삼촌의 어마어마한 군사들과 맞붙어 싸워야 하는 나니아의 군대들이란 쥐와 오소리 등의 동물들과 물의 유령과 나무들과 그리고 페벤시의 남매 루시와 에드먼드, 수잔이다. 왕자는 전쟁 도중 사자 아슬란을 만나 승리하게 되고, 마법의 힘에 의해 페벤시의 남매들은 현실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길 수 있었던 데에는 상상력이 있다. 동물들과 유령, 수목들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텔마린 족을 골탕 먹이고 그들을 제압한다. 미스터리한 마법과 판타지 넘치는 상상력이야말로 영화를 보다 스펙터클하게 하면서도 화려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살아있게 하는 힘은 뭐니뭐니 해도 뛰어난 상상력이다. 월트 디즈니와 윌든 미디어가 만든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는 루이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윌리엄 아담스 감독의 작품이다.
텔레비전 앞에 누워 리모컨을 돌리다가 우연히 다시 본 영화다.
“그래. 저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나라가 우리에게도 있었지!”
텔레비전을 끄면서 나는 불현 신라를 떠올렸다. 아니 왜 느닷없이 케케묵은 신라일까.
알천 산언덕에서 내려다보니 말 한 마리 양산 우물가에 내려와 알을 낳아놓고 날아갔다. 같은 날 사량리 우물가에 계룡이 내려와 겨드랑이로 여자아이 하나를 낳아놓고 가버렸다. 이가 나중에 혁거세왕의 왕비가 된다.
아진포 바닷가에 까치가 울어 나가 보니 파도에 떠내려오는 작은 상자 속에 아이 하나가 울고 있었다. 캄차카 근방 용성국의 왕이 바다에 버린 아기였다. 석탈해다. 석탈해는 귀화인이다. 귀화인이 훗날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처남인 유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다. 믿겨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 신라에서 벌어진다. 신라는 그만큼 안으로나 밖으로나 열려있는 국가였다.
신라 초기의 왕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신라 지배자들이 토착인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암만 그렇다 해도 귀화한 아기가 성장해 왕이 된다는 건 지금 이 시대에도 상상하긴 어려운 일이며, 그걸 현실로 이룰 수 있는 나라가 신라다.
이사부는 우산국을 치러 가기 위해 나무를 깎는다. 조련된 군사와 전함 선단을 끌고 가 우산국 사람들의 항복을 받아내기보다 말로만 듣던 무서운 나무사자를 깎아 배에 싣고 가 어렵잖게 항복을 받아낸다. 나니아 연대기가 살아있는 동물들과 자연의 유령으로 적과 싸운다면 신라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무사자로 우산국을 정복한다.
신라인들은 미스터리하다. 비형랑은, 죽은 진지왕과 잠자리를 한 도화랑이 수태하여 낳은 인물이다. 이른바 귀신의 아들이다. 그는 귀신의 아들답게 귀신과 친하였는데 그들을 이용해 신원사 절벽에 구름다리를 놓았다.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귀신 주엽군이 외적을 물리친 건 죽은 미추왕이 부린 사자의 마법이다.
보희는 어떤 인물인가. 가락국의 딸이면서 이미 신라에 터전을 닦아사는 김유신의 누이다. 그런 그녀가 남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얼마나 질퍽하게 누었는지 경주 시내가 찰랑거릴 정도였다. 처녀의 꿈치고 야하고 발칙하지 않은가. 야하기는 지철로왕도 마찬가지이다. 왕은 거시기가 너무 커 거기에 맞는 마땅한 여인이 없었다. 고민고민 끝에 굵고 긴 똥을 누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 민가의 여인과 결혼한다.
신라는 솔직하다. 이야기를 즐긴다. 관념에 매여 있지 않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역시 천 년을 이끌어온 나라답다. 비록 모퉁이 작은 나라였지만 그들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로웠고, 영토가 주는 폐쇄성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힘 약한 신라가 중국 대륙의 힘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하려 했던 발상도 어쩌면 이런 상상력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놀라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은 신라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계림 그 너머의 세계를 늘 꿈꾸었다. 무엇보다도 천축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데 그들은 조각배를 만들어 무모할 만큼 천축국 항해에 도전했다. 한 해에도 수십 수백 명의 청년들이 풍랑에 휩싸여 죽었지만 도전은 그치지 않았다. 도전을 이룬 대표적인 인물이 혜초다. 그는 장안에서 남중국 광주로, 거기서 뱃길로 천축국에 갔고, 다시 캐슈미르를 넘어 4년만에 당으로 돌아왔다.
신라가 이 땅의 주인이 된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사실을 해학적으로 해석하는 스토리텔링 능력, 문호를 열어놓고 살았던 개방성,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과 도전성.
어찌 보면 신라인들은 모두들 캐스피언 왕자들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페벤시의 남매도 부르고, 사자 아슬란도 부르고, 오소리며 쥐들과도 손을 잡고, 나니아인들에게 그들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도 할 수 있는 이들이 신라인들이다.
신라의 통일을 외세를 끌어들인 불완전한 것으로 폄하하는 이들이 많다. 아직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의 역사를 억지 민족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 하나의 편협이다. 그보다는 그들의 통일을 신라인들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라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