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밤골 풍경
유월의 밤골 풍경
권영상
모내기가 궁금해 논벌에 나갔다. 봄이 오면서부터 나도 바빠져 벽장골 논벌에 나가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모를 심은 뒤라 논벌이 파랗다. 모살이도 다 된 듯 싶다. 작년 겨울에 눈을 맞던 논벌이 파랗게 살아난다. 이제 이 논벌의 주인은 모다. 이게 자라서 꽃을 피우고, 벼이삭을 내고, 들판을 누렇게 물들일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기분좋게 논둑길을 걷는데 비릿한 냄새가 훅 덤벼든다. 길 건너 밤나무숲에 밤꽃이 야단스럽다. 비릿한 밤꽃 내를 맡으며 논둑길까지 벋어나온 밤나무가지를 쳐다본다.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습니다
정현종의 시 ‘좋은 풍경’이 생각난다.
밤나무꽃 비빗비빗한 냄새를 맡으면 그런 음란한 상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어찌보면 밤나무는 굉장히 원초적인 나무다.
인적이 뜸한 농촌이라 지난 가을만 해도 이 밤나무숲에서 밤을 많이 주웠다. 내가 알밤을 주워간 뒷자리로 어느 피가 뜨거운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은밀히 숨어들어 ‘그짓’을 하고간 탓일까. 정말 비빗한 밤꽃이 한꺼번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음욕이 강하게 일어날 만큼 냄새가 진하다. 어느 논의 물꼬쯤에서 돌아다 봤다. 밤나무 숲으로 개 한 마리 걸어들어 간다. 마을에서 먼 여기까지 개는 또 무슨 생각이 있어 하필 비빗한 밤꽃 숲을 들락일까.
논벌을 돌아 마을 어느 골목길을 지날 때다.
그 집 담장에 줄장미가 가득히 피었다. 고개를 치켜세우고 장미꽃에 코를 들이밀었다. 싱싱한 장미향이 흡, 내 몸안으로 스며든다. 장미 향기는 유독 좋은 담배연기처럼 몸 안으로 깊숙이 배어든다. 그래서 시가 파이프를 장미 뿌리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이 담장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길을 다녀봐도 꽃이 많은 집이 좋다. 장미든 라일락이든 백합이든 꽃이 많은 집을 지날 때면 괜히 그 집 안을 들여다 보고 싶다. 그런 집안에선 갓 태어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고, 방금 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아 할머니에게 읽어주는 아이가 있을 것 같다.
그 집을 빙 돌아오는 길 옆에 비닐 피복을 한 참깨밭이 나온다. 검정 비닐 구멍마다 참깨가 파랗게 커오른다. 한 구멍에 세 개씩 네 개씩. 참깨밭이 넓다. 800 평은 될까. 참깨꽃 필 무렵이면 자주 놀러와 참깨꽃 구경을 할 거다. 예전 청계산 자락 외정이 마을에서 두 평짜리 주말농장을 할 때다. 그 농장 곁 매실나무 밭을 돌아가면 참깨밭이 있었다. 한창 키가 클 때면 그 키만도 무려 2미터는 됨즉했다. 거기다가 연분홍 참깨꽃은 키를 따라 다닥다닥 피었다. 참깨꽃 꿀은 또 얼마나 고소하고 달까. 벌통을 수십 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참깨밭은 여름내내 벌들로 북적댔다.
참깨밭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길가에 달맞이꽃이다. 낮에 피는 황금달맞이꽃. 시멘트길과 밭 사이에 경계처럼 서 있는 달맞이꽃 빛이 참 환하다. 길바닥을 지나가는 개미를 볼 수 있을 만큼 눈부시다. 철조망을 한 말뚝 안쪽에는 고추와 완두콩이 큰다.
“워딜 다녀 오는 길이유?”
고추밭에서 일을 하던 할아버지가 내게 아는 체를 하신다.
“그냥 마을 한 바꾸 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가만히 보려니, 우리 집 건너편 고추농사를 하시던 할아버지다. 집 앞에서 볼 때는 고추밭 주인이려니 하고 보았는데 낯선데서 보니 전연 모르겠다.
“구경할 게 많을 거유. 여기 우리 밭에 핀 꽃도 좀 보고 가시우.”
할아버지가 나를 불러들였다.
철조망을 타넘어 뉘집인가 울타리를 따라 들어간 곳에 창포꽃이 있다. 파란 창포꽃이 무덕무덕 폈다. 나는 이 화려하고도 고급스러운 창포의 의상에 놀라 멈추어 섰다.
“좀 가져가실라우?”
할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는 가위로 듬성듬성 창포꽃을 베어주셨다. 화려하게 성장한 여인을 내 품에 안겨주는 것 같아 꽃을 받아안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부랴부랴 집으로 왔다. 혹시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창포꽃이 시들까봐.
마당에 들어서려니 우리 집 꽃밭에도 빛깔 고운 꽃이 있다. 키 작은 채송화다. 마당 잔디를 파헤치고 둥그스럼하게 꽃밭을 만들고 꽃을 심었다. 해바라기, 프렌치 메리골드, 분꽃, 그리고 모종으로 심은 채송화. 그 채송화가 꽃을 피운다. 빨강과 노랑 하양. 세상에서 채송화꽃만큼 또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도 없을 것 같다.
‘예쁘지. 정말 예쁘지.’
그러다가 손에 들고온 창포꽃을 보려니 미안해진다. 꽃 치고 안 예쁜 꽃이 어디 있을까. 나를 미치도록 괴롭히는 마당의 개망초도 꽃만은 비할데 없이 예쁘다.
거실에 들어와 맑은 물병에 창포를 꽂았다. 식탁 위에 놓으니 남자만이 사는 무미한 방이 갑자기 화려하고 기품있는 방으로 변한다.
유월이 초록으로 뒤덮인 단조로운 계절 같지만 실은 그 뒤에 숨은 곱고 화려하고 화사한 꽃들이 있다. 백암에서 들어올 때 어느 집 시멘트 담장 앞에 빨갛게 피던 접시꽃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년 유월엔 창을 열면 금방 눈에 들어올 자리에 접시꽃을 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