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2014. 5. 9. 10:05

꽃모종

권영상

 

 

 

 

 

차를 몰고 백암에서 삼백로 325번 길에 들어서자, 논벌이 드러납니다. 내일 아침이라도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논 수장을 잘 해놓았습니다. 물도 알맞게 대놓아 얼핏얼핏 지나가며 보아도 유리거울 같이 논이 판판합니다. 곧 모내기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꽃모종을 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비가 왔으니 모종할 땅도 촉촉이 젖어있을 겁니다. 꽃모종을 한 다음 날에 비가 오도록 모종 날짜를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하늘의 뜻을 어찌 헤아릴까요. 어제 서울에 일이 있어 하루 늦게 목요일인 오늘에야 달려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집에 와 보니 어젯밤에 또 조금 온 비가 있어 땅이 눅눅합니다.

짐을 들고 거실에 들어와 가져온 밑반찬이며, 국 끓일 애호박, 파, 감자, 양파 그리고 과일을 냉장고에 넣고, 세탁해온 옷가지며 책가방을 정리했습니다. 허리를 펴고는 방청소를 했습니다. 방을 닦다가 걸레 밑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로 올라갈 때 분명히 문을 꼭꼭 잠그고 갔는데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려 방안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걸레 밑이 노랗습니다. 마당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있고, 멀지않은 곳에 솔숲이 있는데 벌써 며칠 전부터 이렇습니다. 집마당의 소나무도 바람이 훅 불면 이불보가 날아오르듯 노랗게 날아오릅니다. 그 탓에 여러 번 송홧가루를 훔쳐내고, 또 이불을 걷어 털고, 그랬습니다.

 

 

 

그러고는 마당에 나갔습니다. 뭔 큰 전쟁이나 치르러온 장수처럼 신발을 갖추어 신고,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모종을 들어나를 세숫대야를 챙겼습니다. 이러고 보니 지난날의 일이 떠오릅니다.

지지난 해입니다. 퇴직을 하고 대구 팔공산 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시는 하청호 시인께서 새로 출간한 시집을 보내주셨댔습니다. 받아서 읽고 고맙다는 답례의 편지를 해드렸는데, 답장이 왔습니다.

“오늘 비오는 아침, 우비를 입고 아내와 비 맞으며 꽃모종을 했습니다. 뜰 안에도 심고, 큰길로 나가는 길 양쪽에도 심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비 맞으며 꽃모종을 한다는 게 너무 부러웠습니다. 어쩌면 꽃모종이 부러웠던 게 아니고 꽃모종을 할 집이 있다는 게 부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꽃밭이나 길가에 꽃모종을 했던 기억이 까마득합니다. 초등학교 때 오랍들 밭 가장자리에 분꽃 봉숭아 과꽃을 심고, 해바라기를 심고했네요. 학교 공부를 마치고 단체로 학교 실습지에 심어놓은 코스모스 모종을 받아 등하교 하는 길 양편에 심던 기억도 새롭게 떠오르네요. 참 오랜 옛날 적의 가물가물한 추억입니다.

그 후, 교직에 주욱 있었지만 학교의 꽃은 꽃 심는 담당 선생님이 심으셨지요. 동네 놀이터나 공원의 꽃은 구청 사람들이 심었지요. 대형 건물들 앞의 꽃은 대형 건물 주인이 아니라 비용을 받은 용역 분들이 심었지요. 아파트 마당의 꽃은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 아니라 관리소 분들이 심었지요. 그럼, 나는 뭐했냐구요? 그냥 꽃 심었구나, 꽃 예쁘구나, 여기 꽃이 있었구나, 해주면 그만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시의 삶이란 그렇습니다. 방관자의 삶입니다. 그냥 살아주면 됩니다. 장마가 져 길거리가 물바다가 되든말든 그냥 구경하고 있으면 됩니다.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리비를 냈으니 그 비용만큼 편리하게 살아주면 됩니다. 텔레비전 유선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내가 쓰는 세제는 어떻게 정화되어 나가는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도 별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살아만 주면 됩니다. 설렁탕 국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거 없습니다. 그냥 먹어 주면 됩니다. 도시를 살면서 나는 그렇게 방관자가 됐습니다. 내가 비용을 내면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시의 삶.

“어떻게 집에 대해 그렇게 몰라요?”

나보다 먼저 와 사는 옆집 아저씨한테 우리 집 상수도 계량기가 어디 있겠냐고 물었더니 절 보고 놀랍니다. 검침원이 검침해 가고 나는 고지서에 수도세금만 넣으면 되었으니 그 위치를 모를 수 밖에요. 그러나 현장 생활을 오래 한 옆집 아저씨는 그런 내가 답답했던 거겠지요.

지난 수십 년 동안 집안 일에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그런 힐난을 들어 마땅했던 거지요. 글 쓴답시고 집안팎의 불편한 일은 아내가 더 잘 아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호미로 모종꽃을 심습니다.

이렇게 꽃모종을 하는 일은 방관자적으로 살아온 내가 내 삶의 주변에 눈을 떠보는 시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손으로 꽃을 심고, 내 손으로 고장 난 것을 고치고, 내 손으로 사람을 불러 도움을 받는 일을 해보려는 첫걸음이 될 테지요.

울타리를 따라 줄장미를 심어놓았는데 그 사이사이에 프렌치 메리골드를 30 센티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이들이 피면 정말 볼만하겠지요. 나는 이들의 노랑과 빨강의 강열한 꽃빛깔이 좋습니다. 마당 주변엔 분꽃을 심었지요. 해질 무렵 피워내는 분꽃 꽃송이가 얼마나 예쁘고 향기로운지 나는 잘 압니다. 해바라기 스무 포기는 바람이 안 부는 쪽에 두 무더기로 나누어 심었지요. 그리고 남은 건 수돗가에 두 포기 심었습니다. 수돗가엔 보름 전에 뚱딴지꽃뿌리를 묻어놓았는데 싹이 많이 났습니다. 이들이 피우는 노란 꽃을 수돗가에 앉아 실컷 보게 생겼습니다.

이제 남은 건 맨드라미와 채송화, 그리고 아직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열대성 꽃(이제 알았네요. 위의 꽃입니다. 북미 원산인 루피너스, 굉장히 멋지고 이국적이어요. 신구대학 식물원에서 씨앗을 받았댔어요)과 깻잎 모양을 한 꽃모종입니다. 너무 어려서 좀 더 크면 옮겨심을 생각입니다.

 

 

 

“아쿠, 허리야!”

내 입에서 허리 아프다는 비명이 튀어나옵니다.

허리를 한번 길게 펴고 심은 꽃모종을 둘러봅니다. 처음에는 꽃 심을 자리를 꼼꼼히 따지고 계산하며 심었는데 나중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구 심었습니다. 내 정신의 한계를 또 한번 느꼈습니다.

물을 주고 나니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해가 많이 기울었네요.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네요. 점심을 먹지 않았네요. 꽃 심는데 팔려 점심도 안 먹고 해가 기울 때까지 있었네요. 이제 쌀을 씻어 안치면 한 시간 뒤에나 먹게 될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배가 막 고파집니다.

과과과과과…….

언덕 너머 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개구리들도 배고픈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