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추석과 가을 운동회

권영상 2012. 6. 21. 10:43

추석과 가을 운동회

 

                                   권 영 상

 

 

추석을 한 주일 앞두고 고향에 내려갔다. 내려간 김에 늘 가보고 싶던 초등학교에 들렀다. 거기엔 넓은 운동장이 그대로 있고, 흰색 벽의 교실이, 교실 앞 화단의 다알리아가, 높다란 국기봉엔 그 옛날처럼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 한켠엔 소나무숲이 또 그대로 있었다. 그 옛날, 우리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추석을 쇠면 그 다음날은 어김없이 가을 운동회가 있었다. 가을 운동회의 응원석은 운동장 한켠에 있는 소나무숲 그늘자락이었다.

 

나는 내 어린 시절, 우리들이 앉아 응원을 하던 그 소나무숲 그늘로 걸어가 조용히 앉았다. 운동회 날이다. 이른 아침을 먹고 교문에 들어섰을 때다. 푸른 하늘이 가득 차도록 만국기가 그림처럼 높이 걸려 있다. 만국기 밑에 섰을 때 왠지 내 가슴은 쿵쿵거렸고, 나는 운동장 가운데에 선 채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내가 세상 속의 한 일원이 되었다는 설레임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를 더욱 설레게 한 것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쾅쾅거리는 행진곡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씩씩한 노랫소리에도 가슴이 뛰었다. 운동회의 제일 첫 경기는 백 미터 경주다. 같은 반 아이들에 비해 나이는 어렸지만 나는 키가 컸다. 그런 탓에 6년내내 서너 살 위의 같은 반 키 큰 친구들과 한 조가 되어 뛰었다. 맨 마지막인 우리 조는 4명이었다. 하얗게 그어놓은 회분 선 앞에 발을 놓고 우리는 선생님의 깃발 신호를 기다렸다. 선생님은 신발코에 대고 있던 깃발을 펄쩍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달렸다. 어리숙한 나는 늘 꼴찌를 맡아놓았다. 1,2,3 등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등위 정돈을 맡은 형들이 친절하게 데려갔지만 꼴찌인 나는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6년내내 나는 공책 한권 받아든 적 없다. 그러면서도 백미터 경주는, 그것이 힘센 사람이든,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든 공평하게 같은 선 앞에서 동시에 출발한다는 점 때문에 흥미있었다. 그것은 어린 내게도 너무나 신선하고 명료한 경기였다.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큰 관심거리는 점심 시간이다. 1학년 동생들이 모래주머니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바구니를 터트리면 나는 어머니와 약속해 놓은 장소로 갔다. 거기엔 손위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엄하시기만 하던 아버지가 벌써 앉아계셨다. 나는 내 앞에 펴놓은 점심밥보다 삶은 밤이 좋았다. 삶은 고구마며, 삶은 계란, 싸구려 눈깔사탕에 손이 먼저 갔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운동회 날은 배고프지 않았다. 볼만한 경기는 주로 오후에 했다. 고학년 여자들은 고전무용이나 곤봉체조를 했고, 남자들은 덤블링을 했다. 이 때면 청군 백군 나뉘어 목이 쇠라고 하던 응원도 없다. 네 편 내 편이 없다. 네 편 내 편이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 운동회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마전과 계주가 시작 되면 우리는 다시 청군 백군으로 갈라져 목놓아 제 편을 응원했다. 어둑어둑 해가 지면 시골학교의 운동회는 끝이 난다. 마지막 점수를 확인하고 우리는 어두워가는 운동장에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했다. 만세! 만세! 만세! 그쯤이면 학교에서 단체로 사 입혀준 검정 물들인 광목 운동팬티며 흰 ‘난닝구’는 흙먼지로 뿌얘진다.

 

그 옛날의 응원자리에서 엉덩이의 흙을 털며 일어선다. 어깨를 겯고 싸움터로 가던 우리들의 씩씩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저기로구나.’ 40여년전, 앳된 소년들의 노랫소리가 귀에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