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이혼 안 하고 살 수 있다니!
대체 이혼 안 하고 살 수 있다니!
권영상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한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밥 짓고, 바느질하고, 길쌈하는 일, 꼼꼼히 살림을 꾸려가는 일. 이런 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 결혼이라는 제도와 맞부딪혔을 때는 누군가 참 잘 만들었구나 했다. 이런 기기묘묘한 일을 꾸며낸 자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그런데 꽤 오랫동안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대체 누가 이토록 위험한 폭발물을 만들어냈을까 하고 그를 원망했다. 장난도 장난 나름이지 이렇게 위험한 장난을 치다니! 어떻게 보면 참 할 일 없는 자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결혼 말고 성인들이 살아나갈 다른 방도가 그토록 없었을까? 아니면 그의 머리가 짧았나.
아니 무슨 할 일이 없어 낯선 성인 남녀를 거의 강제로 붙여놓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서로 쌈박질하며 ‘웬수, 웬수’ 살도록 했을까. 그의 짧은 소견과 천박한 아이디어가 한심스러웠다. 우리가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다. 결혼이란 거의 당사자의 호불호와 상관없는, 강제적인 의무조항이었다. 그 희생자가 가히 얼마였을까. 조선의 여인 중에 가장 결혼제도 탓에 피해를 본 이가 허난설헌이다. 어찌보면 난설헌은 황진이나 매천, 홍랑 등의 기녀들만 못 했다. 그들은 일찌기 결혼에서 벗어난 자유여인들이었다.
요즘은 서구방식을 받아들여 대개 동거를 해 보고 결혼을 하는 모양이다. 결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상대방의 성격이나 속궁합은 맞는지, 일종의 결혼 적성 검사를 해보고 결혼을 하는 추세다. 그렇더라도 고공 이혼 행진의 심각성은 여전하다.
며칠 전, 모 일간지에서 이혼에 관한 기사를 봤다. 2012년도 한 해, 32만여 쌍이 결혼을 했고, 그 해 11만 4781쌍이 이혼을 했다. 그러니까 대체로 세 쌍이 결혼을 하고, 그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는 이야기다. 가장 큰 이혼 사유는 47. 3%나 되는 성격 차이이다.
이런 이혼 기사를 볼 적마다 느끼는 게 있다. 이혼하지 않고 사는 나의 삶이 기적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왜 그 대열에 들어서지 못했을까. 남다른 적응력이 있었던가? 30여 년씩이나 성격이 다른 나와 아내가 가정을 유지하며 티격태격 살아낸다는 일이 불가사의할 정도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나의 '결혼의 3대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남녀가 눈이 맞아 결혼을 하는 일이다. 성인 남녀가 눈이 맞는 일이야 자연스런 현상이다. 아무리 자연스런 현상이라 해도 눈이 맞아 서로 사랑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결혼이라는 지뢰밭으로 뛰어드는 행위 자체가 기이하고 의문스럽다. 결혼을 목적으로 남녀는 눈이 맞는가? 눈이 맞으면 결혼을 해야 하는가.
한번 결혼해 살얼음판을 걷듯 사는 일도 고단하다. 그래서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한다. 그런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 부부로 살자는 이들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이승에서 어떻게 살면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 살고 싶어지는 걸까. 얼마나 끔직히 행복했으면 이 세상 부부살이가 짧다고 느껴지는 걸까. 서로를 속이기 위해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는 건 아닐까. 다음 세상을 예약하는 그들 부부의 사랑법이 나에겐 불가사의하다.
세 번째 불가사의가 있다. 결혼학이다. 왜 그 많은 교과과목 중에 결혼학이 없을까. 공부라면 전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덤벼든다. 그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이다. 제도권 교육만으로 성이 안 차 고액과외에 고액학원까지 쫓아다닌다. 심지어 공부와 관련된다면 수영에 바둑에 태권도에 심지어 다른 사람의 취미까지 배우러 다닌다.
그런데 매우 불가사의한 건 이혼율이 이렇게 높은데 왜 결혼학 강의가 교과목에 없을까, 그거다. 이혼이야 하든말든 관여할 바가 아니다? 결혼쯤이야 아무나 하는 만만한 장난쯤으로 본다? 섹스 하는 법, 자식 키우는 법, 부모 되는 법, 부부싸움에서 잘 이기거나 잘 져주는 법, 외식할 때 충돌없이 음식 정하는 법, 요령있게 쇼핑 잘 따라다니는 법, 아내와 남편을 잘 이해하는 법, 친정에 관한 문제, 시댁에 관한 문제.......결혼공부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도 결혼학이 없다는 건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다.
말할 수 없는 인내와 견딜 수 없는 고충을 참아내는 일이 결혼생활이다. 누가 결코 조화로울 수 없는 이토록 위험한 결혼 방식을 만들어 냈을까. 수도자의 고행이 뼈를 깎듯 힘들다 하나 결코 가정을 평탄히 끌고가는 부부 생활이라는 고행만 할까.
창밖 하늘로 번지는 노을을 본다. 티격태격 싸움없이 조용히 넘어가는 오늘 하루에 무릎을 꿇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