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부끄러움 한 덩이

권영상 2012. 6. 21. 09:13

부끄러움 한 덩이

 

                             권 영 상

 

 

 

“얼라리여어! 또 한 단을 베었다!”

아버지는 들에서 일을 하실 때면 가끔 '소리'를 하셨다.

그 넓은 들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는 고요한 가을 들판으로 날아갔다. 부끄러움을 한창 탈 나이에, 그것도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논벌에서 아버지의 소리를 듣는 일은 몹시 창피스러웠다.

 

그때의 아버지란 내게는 아주 엄하시고, 말도 함부로 붙일 수 없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내 곁에서 소리를 하시니 나로선 당황스럽다 못해 죽을 맛이었다. 지금처럼 부자관계가 허물없는 사이라면 아버지, 창피해요, 그렇게 막아볼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니 나는 벼포기 속에 벌개진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어리석었던 나는 아버지의 그 소리를 행여 누가 들을까봐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래선지 그 당시 아버지와 함께 일할 때면 나는 그런 부끄러움 한 덩이를 늘 가슴에 숨기고 다녔다.

 

 

"한걸음 또 한 걸음을 떼어놓자. 길 우에서 태어나 길 우를 가는 사람."

아버지가 되어 나는 가끔 어린 딸아이와 길을 갈 때면 이런 '소리'를 한다. 문방구에 데려갈 때에도, 동네 뒷길에 흐벅하게 핀 목련을 보러갈 때에도 나는 되는대로 소리를 했다. 그러면 어린 딸아이는 누가 듣는다며 내 입을 막았다. 딸아이는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 나의 그런 소리가 몹시 부끄러웠던 거다.

 

뭐가 부끄럽냐고 물으면 너무 촌스럽다는 거였다.

딸아이의 귀에 나의 소리가 이 도회지의 반듯한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은 소리하는 아빠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어쩌면 그 아빠와 함께 가는 자기가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아마 예전의 내가 아버지의 소리를 부끄러워한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 얼마전, 우연하게도 인터넷에서 '농요'를 만났다.

내 고향 강릉 농요 중에는 나도 어지간히 따라할 줄 아는 '벼베는 소리'가 거기 있었다. 나는 점심을 재촉하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그걸 켜둔 채 식탁머리에 앉았다. 내 아버지와 너무도 흡사한, 땀에 절고 힘에 겨운 한 촌로의 애잔한 '소리'가 컴퓨터에서 날아나왔다.

 

밥 한 숟갈을 막 들던 내 목울대를 그 ‘소리’가 은은히 건들었다.

갑자기 내 목이 울컥했다. 나는 아내와 딸아이 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솟구쳐오르는 울음을 울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소리'가 창피해 숨도 못내쉬고 참았던 '부끄러움 한덩이', 그게 눈물이라는 그리움으로 터져나왔던 모양이다.

 

울음을 우는 나를 보고 딸아이가 아빠! 그렇게 위로해준다.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살아계실 땐 너무도 몰랐던 그 분이 이렇게도 우연히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 찾아와 눈물을 주고 홀연히 가실 줄은. 나도 딸아이의 한 아비면서도 그 아버지를 모르겠다.

살아가는 일이 대체로 무위로울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