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는 때로 행복하다

권영상 2012. 6. 20. 15:01

 

나는 때로 행복하다

 

                            권 영 상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 애완 토끼 한 마리를 분양 받았다.

내가 아니라 어린 딸애가 그래왔다. 저의 엄마와 앵무새를 사러가겠다고 나가더니 한 옹큼만한 애완 토끼를 뜻밖에 안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딸아이와 나는 토끼 이름을 난나로 지어주었다. 처음 난나는 한 숟갈씩 우유를 먹었다. 그러더니 크면서 이내 사료를 먹었다. 사료는 워낙 딱딱한 덩어리라 난나는 어린 이빨로 간신히 깨뜨렸다.

 

그게 안타까워 무쪽을 베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날감자 껍질을 벗겨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 토끼라는 짐승이 사람을 몹시도 애타게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내 손에서 사과 한쪽을 받아내는 데도 온갖 애정을 표시했다. 나와 눈을 맞추려 애쓰고, 내 손에 제 볼을 부비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누워 팔을 벌리면 내 팔에 답쑥 안기고, 손을 펴면 손안에 홀짝 들어와 앉았다.

 

마른 똥도 꼭 읽다가 둔 신문에다 별자리처럼 톡톡톡 누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니었다. 배설할 자리를 무슨 판단으로 결정하여 그렇게 하는지 기특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일로 난나의 오물 치우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와 놀아주는 것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하기는커녕 퇴근 후엔 한 시간씩 꼭 그와 놀아주었다.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람이 되어가지고 어떻게 미물의 청을 거절할 수 있나.

 

거실로 데려와 한 시간쯤을 놀면 난나는 그 한 시간의 휴식에 대단한 만족감을 느꼈다. 만족감의 표현으로 내 곁에 벌렁 누웠다. 그것도 껑충 뛰어서는 등을 바닥에 대고 휙 돌아 누웠다. 그리고는 편하고 행복한 표정을 해가지고 기지개를 켜듯 온몸을 쭉 늘였다. 난나가 그토록 행복해 하는 걸 보면 나도 한가로웠던 오늘 한 시간이 만족스러웠다.

어른이 돼 가지고 할 일 없이, 그것도 토끼와 우스꽝스럽게 놀아주다니!

그렇게 빈정대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겠다. 쉬어도 돈 들여가며 쉬고, 놀아도 제법 품위있게 놀아야 한다는 말에 반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무 한쪽을 주고 그걸 다 먹을 때까지 무심히 바라보는 행복 또한 여간 큰 행복이 아니다.

 

나는 어렸을 적, 여름이면 오후 내내 소를 몰고 들판에 나가 풀을 먹였다. 비오는 날이면 들판에 방목이 어려워 밭둑이나 좁은 길에 난 풀을 뜯겼다. 잠시나마 한눈을 팔면 소는 근접한 밭의 콩잎을 슬쩍했다. 그러니까 그 일을 막기 위해 나같이 어린 우리들은 오후내내 소의 고삐를 잡고 소와 함께 긴긴 오후를 보냈다. 그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우리는 지루하지 않았다. 풀 뜯는 소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딸애가 우유 한 컵 마시는 걸 바라보는 일도 재미나다. 그건 난나도 마찬가지다. 만족스럽게 먹는 일을 바라보는 건 시간낭비가 아니다. 진정으로 내 영혼을 쉬게 하는 행복함이 깃든 행위다.

오늘도 아내는 깍두기를 한다며 슈퍼에서 사온 무 껍질을 칼로 벗긴다. 나는 그게 버려질까봐 바구니에 담아낸다. 담아낸 무 껍질을 고만고만하게 잘라 무명실에 꿰어 바람 통하는 곳에 걸어두면 뽀독하게 마른다. 여태 먹여 봤지면 홍당무를 제외하고 무나 사과, 귤껍질은 물기를 조금씩 덜어낸 게 난나에게 좋다. 곰상스럽긴 하지만 하나의 목숨을 위해 이렇게 내 손이 쓰여진다는 게 때론 아름답다.

“봄풀을 먹여야 살이 오른다.”

예전, 고향 아버지는 여물만 먹여 소의 살이 오르지 않으면 그러셨다.

 

난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한겨울 삼동을 보내면서 난나도 제조된 먹이보다 싱싱한 풀이 그리울 테다.

가끔 창밖의 겨울숲을 본다. 봄은 아직도 먼데 있다. 한 어린 생명의 입맛을 생각하며 부질없이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봄은 언제 오나.

 

권영상 산문집 <뒤에 서는 기쁨>(좋은생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