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엄마, 찬장 속 고구마 먹어도 돼요?

권영상 2012. 6. 20. 14:54

 

 

 

엄마, 찬장 속 고구마 먹어도 돼요?

 

                                                       권 영 상

 

 

 

 

나는 복이 많아서인지 근무하는 직장이 조촐한 산 언덕에 있다. 산 언덕엔 오밀조밀 작은 집들이 들풀처럼 겹겹이 자리하고 있다. 그 겹겹이 싸인 집들 사이로 골목길은 또 헝클어진 핏줄처럼 숨어있다. 그 골목길이 좋아 나는 한길을 두고도 아예 그 길을 퇴근길로 삼은 지 오래다.

 

골목길을 걷는 시간도 가급적이면 해질 무렵이 좋다. 그 시각을 맞추기 위해 나는 뉘엿뉘엿 햇살이 기울 때를 기다려 퇴근을 한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옥상 위 빨랫줄에 머물던 저녁 햇살이 훌쩍 사라진다. 그쯤이면 언제나 그렇듯 딸깍, 장독 뚜껑 부딪는 소리가 난다. 장국을 끓이기 위해 허리를 굽혀 장독 여닫는 소리다. 소리로 말한다면야 그뿐이 아니다.

 

쪽대문 밖으로 휙 내던지는 물소리며, 텔레비전에서 울려오는 만화영화의 주제가 소리가 있다. 쪽마당이 골목길보다 낮은 집의 부엌에서 들리는 숟가락 달각이는 소리, 저녁밥을 기다리다 못해 소리치는 '엄마, 찬장 속 고구마 먹어도 돼요!'하는 소리. 그 소리들이 모두 정겹다.

 

골목길로 북어 몇 마리 사들고 달려오는 텁수룩한 아저씨의 자전거 종소리, 그 뒤를 컹컹거리며 쫓아오는 개 짖는 소리, 뉘집에선가 저녁술에 취해 불러대는 어른의 낯익은 유행가, 그런 중에도 골목 창에 폴짝 저녁불이 켜지며 밥 먹자! 그러는 푸근한 안주인의 목소리가 정겹다.

 

그들은 지금 빨갛게 쏟아지는 불빛 아래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들 거다. 하루종일 헤어져 지내느라 못 나눈 이야기를 하며. 친구와 다툰 이야기거나 선생님께 칭찬받던 이야기, 아니면 엄마가 일러둔 말을 어겨 야단을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것이 저녁길을 걷고 있는 내겐 정답게 느껴진다. 그런 까닭은 저물어가는 저녁 시각 탓도 있겠지만 본디부터 골목이 품고 있는 소박함 탓일지도 모른다.

 

 

어둠이 골목길로 설핏설핏 내려선다. 골목으로 벋은 감나무에서 감잎 한 장이 툭 떨어진다. 기왓장 위에 간신히 얹혀있던 종이비행기가 제 무게를 못이겨 떨어지고, 담장을 타던 고양이가 성큼 골목길로 내려선다. 나는 또 산언덕에서 이렇게 한길을 찾아 내려오고.....

 

한길을 찾아 내려가는 내 발길이 자꾸 빨라진다. 가까운 전철역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철을 타고 아직 멀리 있는 내 집으로 가야한다. 나의 집에서도 저녁불을 켜고 딸아이와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얼핏 걸어온 길을 돌아다 본다. 골목길이 나무둥치빛 갈색 어둠속으로 숨는다. 이 저녁, 그것마저 정겹다.

 

월간 <좋은생각>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