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오늘따라 못내 그리운 그날의 교실

권영상 2012. 6. 20. 14:13

 

오늘따라 못내 그리운 그날의 교실

                                           

                                            권 영 상

 

 

 

소식도 없이 비가 내렸다.

가을날의 비 내리는 저녁 시간이 금방 진한 갈색 나무빛 어둠으로 변한다. 도서관을 나섰다. 우산도 없이 빗길을 내려서려니 괜히 망설여진다. 그러나 괜히 망설일 뿐이지 나로서는 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비를 맞으며 수척한 나무들 사이를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영상아!”

 목소리가 따뜻했다.

 

그분이었다.

그분은 멈추어 서 있는 내게로 우산을 쓰고 다가왔다. 퇴근시간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내 곁에 선 그분이 자, 그러며 우산 안으로 내가 들어서길 바랐다.

나는 몸을 작게 하여 그 궁륭같은 우산 속으로 들어섰다. 아늑했다. 손잡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손잡이의 윗부분을 잡았다. 그래도 그분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선생님, 불렀다.

같이 잡고 가자, 그랬다.

그분과 나는 그렇게 걸었다. 플라타너스 늘어선 길은 교문까지는 멀다.

말없이 걸었다.

걸으면서도 나는 그 닿을락말락하는 그분의 따뜻한 손의 체온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갈색 나무빛의 그 저녁이 좋았다.

 

그분은 우리 시골배기 사내아이들의 영어를 맡았다.

우리는 그 긴 머리칼과 고운 눈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끔 그분을 울게 했다.

그때마다 그 분은 화를 내는 대신 맑고 깨끗한 눈물을 닦고 우리들에게 이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어느 바닷가에서 애니 리라는 소녀와 밀가루 찧는 방앗간 집 외아들 필립, 그리고 거친 뱃군의 아들로 태어난 이녹 아덴이 살았단다."

 

그러면 우리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 이야기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방금 눈물을 닦은 그분의 맑은 눈이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맑은 눈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애니 리와 결혼을 한 이녹 아덴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먼바다로 나가는 배를 탔단다. 그런 그가 떠난 지 7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어. 애니리의 눈엔 눈물 마를 날이 없었고....."

 

이야기가 거기쯤 가면 우리들은 그 분의 맑은 눈에 또다시 어리는 물기를 얼핏 보아야 했다.

 

"홀로 살아가기 어려워진 애니 리는 자신을 보살펴주는 필립의 간청을 받아들여 끝내 그와 결혼을 하고 말았지."

 

그러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두고 결혼할 수밖에 없는 애니 리가 가여워 우리는 그분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이 이녹 아덴이 마을로 돌아오게 됐단다......고향 마을로 돌아온 그는 밤길을 걸어 자신이 늘 바다로 나갈 때 들르던 선창가 선술집을 찾아갔고, 거기에서 자신의 아내가 필립과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지 뭐겠니?"

 

어린 우리들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아, 그랬다. 우리들의 감정은 끝없이 고조됐고, 그분도 감정이 복받치는지 이야기를 끊고 창밖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돌아온 이녹 아덴은 필립과 그의 아내를 어떻게 할까? 우리는 그분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져 나갈지에 대해 은근히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다시 그 이야기의 절정을 기다릴 때쯤이면 안타깝게도 종이 울렸다. “우우우우......” 뒷이야기가 긍금해 웅성거리면 그분은 칠판에다 그 이야기의 책이름을 적었다. “테니슨의 <이녹 아덴>.“ 그러고 그분은 젖은 눈을 한 채 출석부를 가슴에 안고 교실을 나갔다.

 

 

 

 

그뒤, 나는 <이녹 아덴>을 읽지 못했다. 도서실은 있었지만 주로 시멘트 종이로 겉장을 덧붙인 낡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예의 그 책은 거기에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읽지 않았을 거다. 그분이 우리에게 눈물과 함께 들려주던 그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을 테니까.

 

 

그후로 나는 그 시골학교를 졸업하고 그분과도 헤어졌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지만 산다는 게 실은 ‘우연’이 이어가는 행로라고 본다.

정말이지 너무도 우연하게 나도 예전의 그분처럼 교단에 서게 되었다. 나는 가끔 수업을 하다가도 그분을 떠올린다.

 

"아주 오래 전, 여선생님 한분을 몹시도 좋아했던 소년이 있었다. 비 내리던 늦은 가을, 진한 나무 빛깔의 어둠 속을 소년은 그분과 함께 호젓이 걸은 적이 있었다. 그날 그분은 자신의 우산을 내게 주었지. 그러고는 먼 밤길을 혼자 가는 내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주셨단다. 근데 그분이 내게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말이다. 어느 바닷가에 애니 리라는 소녀와 밀가루 찧는 방앗간 집 외아들 필립, 그리고 거친 뱃군의 아들로 태어난 이녹 아덴이 살았단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34년 전 그분의 이야기를 그렇게 되풀이 할 때가 있다. 이야기를 이야기만으로가 아니라 애틋한 감정으로 전해주던 그분, 우리를 애닯게 하던 그분의 그 감정대로.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립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이 과장인 줄은 알지만 오늘따라 34년 전, 그날의 교실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