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홀로 살아본다는 일
남자가 홀로 살아본다는 일
권영상
“텔레비전 사러 갑시다.”
아내가 방 정리를 하고 있는 내게 재촉합니다.
안성으로 내려갈 날이 이제 꼭 열흘 남았습니다. 아내가 다니는 학교의 개학이 19일이니 아내의 도움을 받을 날도 사흘 밖에 안 남았네요.
지난 해 봄입니다.
문득 아침마다 출근하던 학교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직장에 매여 살았으니 직장에 갇혀 사는 나를 좀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 수고한 내 몸을 위해서도, 서울살이에 지친 내 육신을 위해서도 직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명예퇴직, 어떻게 생각해?”
주변 사람들에게 슬쩍 내 의향을 건넸습니다.
“아니 그 좋은 직장을 관두다니! 배 부른 소리 그만 하게.”
사람들은 모두 내 생각을 적극 만류했습니다.
'농사 짓는다는 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줄 아는가?' '시골에 혼자 내려가 살다가 외로워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많이 봤다네.' '전원생활? 그냥 그런 꿈 한번 가져보는 거지, 실제로 생활해 보면 골치 아프지'....
어떻게 보면 그 충고들 모두 옳은 말입니다.
전원생활, 전원 생활, 하면서도 실행을 못하는데는 다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가장 견디기 힘든 충고가 있습니다.
‘배 부른 소리 말아라’, 왜 고생 사서하려 하나.’, ‘직장 그만 두면 당장 크레디티가 없어져 사람 대접을 못받는다.’ ‘나이 먹어 편하게 살어.’ 등의 말입니다.
다들 직장이라는 데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큰 이유가 또 이런 것들입니다. 열심히 직장생활 했는데 행여 또 고생할까 그게 은근히 걱정인 거지요. 그런 지나친 걱정 때문에 모두들 스스로 직장에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금방 직장을 그만 둘 듯 큰소리치는 사람도 그러지 못하는 데는 직장에 대한 의존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나는 결코 배 불러서 직장을 그만 둔 게 아닙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게, 더 불편하게, 더 외롭게, 더 의미있게 살아보겠다는 나의 언행에 대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말로는, 또는 글로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듯이 하면서도 실제로는 한 치도 집밖을 나서지 못하는 언행불일치. 나는 나의 그런 성격이 싫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란 자기 모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느낀 것이 이제는 좀 그런 데서 과단성있게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 자신에게 참 많은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물질이 넘치는 경쟁사회 속을 살아내자니 어쩔 수 없이 나를 달래려고 위선과 거짓을 저질렀겠지요.
이런 저런 6개월 동안의 고민 끝에 더럭 명예퇴직원을 냈습니다.
나의 결단은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런 결정이 있고부터 나는 머물 곳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차선책이긴 하지만 그곳이 안성이었습니다. 양평 쪽을 다녀봤지만 거긴 내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거긴 땅 한 평 갈아부쳐볼 곳이라기보다 집 잘 지어놓고 사는 모양을 남에게 보여주는 쪽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향이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이천과 여주, 용인이었는데 그만 안성까지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농가 속에 거처한 고향 같은 땅입니다. 마을이 가까워 밤에도 무섭지 않아 좋겠습니다. 제 성격상 밤이어도 무섭지 않게 잠 잘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서울과의 거리도 한 시간 정도여서 좋습니다. 결국 그런 조건에 대충 들어맞는 곳이 안성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 두겠다고 생각한 지 1년 4개월, 직장을 그만 둔 지 6개월만에 비로소 안성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기회는 놀랍게도 빨리 왔습니다.
일단은 혼자 내려갑니다. 혼자 내려가 마당도 고르고, 나무도 심어 키우고, 땅에 거름을 주어 밭노릇을 하게 만들고, 무성한 풀을 베고, 헝클어진 나뭇가지를 치고 그렇게 사람 살만한 집을 만든 뒤에 아내를 부를 작정입니다. 대개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의 패턴이 그렇습니다. 전원생활에 동의해준 아내가 제일 고맙지요. 그러니 이제 저의 임무는 사람 살 터전을 잘 잡는 일입니다.
“이불도 사려면 빨리 나가야지!”
나는 공구들을 정리하다 말고 아내의 말에 벌떡 일어섭니다.
어제는 하나로 마트에 가 농기구와 공구를 샀습니다. 농기구는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에 가면 다 있습니다. 삽, 괭이, 낫, 전지가위, 땅고르개, 제초기 그리고 톱, 펜치, 망치.... 없는 게 없습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도 살 겸 차를 몰고 마트에 갔습니다.
텔레비전은 꼭 보아야할 건 아니지만 외로울까봐 작은 18.5인치를 샀습니다. 밥솥과 가스레인지도 샀습니다. 처음엔 이불만 싸들고 가겠다며 큰소리를 쳤는데 막상 가려고 보니 행주도 필요하고, 국자도 필요합니다.
“이불은 집에서 쓰던 거 가져가지뭐.”
비용 때문에 아내가 신경쓸까봐 나는 뭐든지 ‘사지 말자주의’입니다.
“여름 이불 두 채 세 채 들여놓고 사는 집 어딨어?”
아내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렇습니다.
결국 이불을 사고, 그 곁 건물에서 나무의자 두 개를 샀습니다.
나는 연실 아내 눈치를 살핍니다. 당당하려 하지만 물건을 자꾸 사게 되니 내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아내를 집에 혼자 두고 가는 나를 보고 아내가 ‘좀 무책임하다’ 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살 때도 어떨 땐 매우 기분좋아 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그러니 이래저래 눈치를 안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아내 손이 꼭 필요한 것만 아내 힘을 빌리고 나머지는 현지에 가서 혼자 구입하는 게 좋아. 사들이는 거 보면 누구나 화 나지!”
백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집을 구하는 일도 어렵지만 아내와 함께 살림도구를 준비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모두 비용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가지고 내려갈 책을 또 모아보았습니다.
처음엔 내가 쓴 저작물만 몇 권 간소하게 가져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 책 저 책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가 새로이 배울 일도 많겠지만 무엇보다 내 영혼이 빈곤해질까 두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종교와 철학에 관한 책을 몇 권 더 넣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이 두 상자나 되었습니다.
편지를 부칠 때 쓸 풀도 넣고, 한번도 안 써본, 책 세워놓고 읽는 도구며, 성가시다고 안 쓰던 만년필과 잉크병도 넣었습니다.
가져갈 것들을 하나하나 챙기다 보니 내가 무엇에 갈증을 느끼며 살았는지 금방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란 결혼을 하여 둘이 살다가 다 살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마칩니다. 결혼을 하여 사는 일이란 부딪히는 일이 많아 서로 불편을 감수하며 살지요. 그러나 편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그 편리함 때문에 그만 십자매처럼 안락한 조롱속에 갇혀 살게 되지요. 그러면서 천천히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집이라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나이를 먹어보니 가끔 혼자 머물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발길 따라 걷다가 날이 저물 때쯤이면 저 모르게 머물러 쉴 곳 말이지요.
하루, 이틀, 또는 한 주일씩 영혼을 쉬게 할 곳.
자신에게 닥쳐오는 시간과 마주해 보고, 때로는 그 시간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직장에 가고 없는 빈 집에서 홀로 나는 다섯 달을 살아보았습니다. 내가 밥을 해먹고, 방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은행일을 보고.... 그 일이 좀 성가시긴 하지만 그 외의 시간들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처음 알았습니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이에겐 가끔 혼자 누려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힘들게 산을 오른 후, 혼자 천불동 계곡이나 백담계곡을 타고 하산하는 맛은 동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내려오는 맛과 다릅니다. 하산할 때 혼자 보는 금강초롱, 혼자 보는 노루오줌풀, 혼자 보는 일몰과 혼자 보는 밤하늘의 별은 내 걸음 하나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안겨줍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자문하게 합니다.
안식년처럼 결혼하여 사는 부부들도 가끔은 두어 달 정도 헤어져 조용히 생활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있는 일 같습니다.
“혹시 그 집 이름 같은 거 안 지었어? 뭐 관묵재 같은.”
아내가 언제부턴가 은근히 서재 이름 짓기를 바랐습니다.
“나 같은 소시민이 그런 거 쓰면 우습지.”
솔직히 그런 어마어마한 서재 이름을 붙여놓고 학자연 척하며 사는 건 질색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뭔가 신념이 될만한 생각을 가지고 내려갈 필요는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종교가 되기도 하고, 자신을 버텨낼 이념도 될 테니까요.
“있다면 비우(庇雨)정신쯤이랄까.”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이 그 말입니다.
비우란, 조선 초 문신 유관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집에서 우산을 쓰고 살았다는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깨끗이 산다는 뜻이지요. 외람되게 그런 분의 청빈을 본받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비슷한 삶을 꿈꾸어 보겠다는 마음은 가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애초부터 집 잘 지어놓고, 사람들 불러 먹이고 즐기고 그러고는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전에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땅을 갈고, 추수하는 법을 서투나마 내 손으로 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에 휘둘리며 사는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수요일, 그러니까 21일, 안성 집에 살던 분들이 이사를 갑니다.
내일쯤 찾아가 이사를 가서도 아이들 잘 키우고, 행복하게 사시라는 말을 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들도 일부러 서울을 떠나와 안성 시골에서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생각이 깊은 부부입니다. 그들의 앞날을 나이 먹은 내가 축원해 주면 그들도 기뻐할 테지요.
그 집에 들어가 살 날이 24일이니 꼭 여드레 남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