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절규를 받아주는 숲

권영상 2013. 8. 7. 14:47

 

 

절규를 받아주는 숲

권영상

 

 

 

 

아파트 뒷문을 나서면 우면산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고속도로를 끼고 가는 길이다. 주변이 모두 느티나무 숲이다. 내가 알기에 심은 지 15~6년이 넘는 숲이다. 그런 탓에 숲이 깊다. 마을로부터 숲이 떨어져 있어 혼자 조용히 걷기엔 몹시 편안하다. 저녁 식사를 끝낸 시각이면 으레 느티나무숲에 나가 별자리도 보고, 차고 이우는 달도 놓치지 않고 본다.

 

 

 

무엇보다 이 도시 곁으로 지나가는 계절을 바라볼 수 있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간다. 처음과 달리 요새는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한다. 겨울이 서서히 마을 가까이로 다가오고, 느팃잎이 말없이 지는 밤이었다. 바람이 설핏만 불어도 가지에 남아있던 낙엽들이 한 뭉치씩 풀썩풀썩 떨어졌다. 나무 밑은 지난 몇 년 동안 쌓인 낙엽들로 발을 딛으면 마치 수렁에 빠지듯 푹푹 빠졌다. 그 위에 가을의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는 걸 바라보며 걷고 있을 때였다.

 

 

 

“오빠!”

저쪽 오솔길 끝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젊은 여자였다. 낙엽이 힘없이 지는 밤, 여자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나는 걷던 길을 멈추었다. 지난 여름, 몹시 비 내리던 날, 이 느티나무숲에 와 쓰러진 채 비를 맞는 사내를 본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미안함 탓이었을까. 누군가를 한없이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목소리는 이쪽, 느티나무숲을 향해 날아왔다. 울음에 가까웠다. 울음도 눈물 있는 울음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날려보내는 허허로운 울음이었다. 꽉 막힌 가슴을 뚫어보려는 절규, 그래 그런 절규였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뭔가 배신당한, 뭔가 하소연할 데 없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절규였다. 그 때, 내 느낌은 그랬다. 목소리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단지 느티나무 낙엽더미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를 부르고만 있었다.

 

 

미한 가로등 불빛에 보아도 스무 살 중반을 넘긴 내 딸아이만한 나이였다. 나는 가여운 마음으로 그 곁을 지나 오솔길 끝에 다다랐다. 거기 택시 한 대가 미등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슬픈 목소리가 택시를 타고 여기를 찾아와 절규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숲을 걷다보면,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뭔가 속에 숨긴 그 무엇을 토하고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던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사라지곤 한다.

 

 

 

요즘도 산에 가면 가끔 산등성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야호!’ 소리가 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목청 같이 크다. 그 잘 숙련되지 않은 거친 목소리의 ‘야호’도 어찌 들으면 비명 같다. 처음엔 나도 속으로 그 ‘야호’를 나무랐다. 산에 사는 짐승들의 터전을 뒤흔드는 상식 없는 사람쯤으로. 그러다가 그들 목소리에서 꽉 막힌 답답함을 차츰 느끼면서부터 소리칠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며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 상식을 넘는 일을 하는 데엔 상식을 넘는 그 무엇이 그들 내부를 짓누르고 있다. 내뱉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 무엇이 차올라 있다.

 

 

경문왕 시절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산이나 숲은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의 절규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의 숲은 보호되어야 한다. 도시인의 아픈 가슴을 쓸어주는 어머니의 품안과 같기 때문이다.

(교차로신문 2011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