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어머니가 주고 가신 먹과 벼루

권영상 2012. 6. 20. 13:58

어머니가 주고 가신 먹과 벼루

 

                                          권 영 상

 

 

어머니께서는 절 보고 그러셨지요? 미안하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제가 그런 말을 부모의 입을 통해 들어도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떻든 그날, 어머니가 제게 그런 말씀을 한 연유는 알고 있답니다. 그 말이 수십 년 동안 어머니 마음속에 숨겨 둔 용서의 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압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제 귀로 들었다는 것이 못내 서운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도 잘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근 17년 동안을 병석에 누워 계신 이유를.

 그러니까 제가 중학 1학년 어느 여름날로부터 어머니는 17년 동안을 입원과 퇴원을 쉬임없이 반복하셨지요.

 

어느 겨울, 아버지는 장설이 진 아침에 제게 그랬지요.

할미꽃 뿌리로 고은 엿이 어미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더라고요.

그래 그날부터, 할미꽃 뿌리를 캐기 위해 몇 며칠이나 15살 된 저는 아버지와 함께 눈 덮인 산야를 헤맨 기억이 있지요. 그것도 실은 우환치레의 극히 일부였지요.

 

언젠가 마지막 땅문서를 궤속에서 꺼내시며 아버지가 그러셨지요.

네가 학교에 못 가는 한이 있어도 어미는 살려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러나 저는 그때 대관령 너머의 도회에 대한 꿈이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끝내 고등학교 진학을 미루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꿈이 남아있어 제가 꿈꾸었던 그 도회에 와 이제 쉰 나이를 먹었답니다.

 

 그 어느 겨울날, 어머니는 저를 찾아 바로 그 도회에 오셨고 이레를 주무시고 가셨지요.

어머니가 가시고 난 그날 밤, 아내는 애들 손바닥만한 벼루와 몽당붓과 도막먹을 제 앞에 내놓았어요. 나는 그게 무엇인 줄 금방 알았지요. 그건 어머니가 우리 집에 시집을 오셔서 외로울 때나 적적하실 때 외숙에게 편지를 쓰시거나, 박부인전이나 임진록을 필사하시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것들은 생애의 목숨처럼 귀히 여겼습니다.

 

이게 웬 거냐니까. 아내가 간신히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대관령을 넘어갔다 싶거든 애비한테 주라하셨다고요.

나는 그 순간 아!하고 소릴 질렀지요.

어머니가 내게 이렇게 빚을 갚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요.

막내인 제게 그 소중한 걸 주실 이유가 그것밖에 달리 없다고 생각됐습니다.

 

모자간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불우했던 유년을 어머니는 늘 어머니의 병환 탓으로 생각하셨겠지요. 실은 제게도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네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남기고 가신 벼루 일체를 제가 간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쓸쓸하고 애닯기만 했습니다. 아흔 어머니의 이승을 정리하시려는 뜻 같아 더구나 그랬습니다.

 

어머니, 세상에 참 이런 화해도 있구만요.

지난 17년 동안의 어머니의 병환은 저와 우리 가족에게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요. 그걸 빚이라 생각 마세요. 그 일을 기억하기엔 벌써 3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생각할수록 인생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느낌입니다.

추석에 뵙겠습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