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동 소나무들
초당동 소나무들
권영상
소나무에겐 우아한 매력이 있다.
특히 내 고향 초당동 소나무들은 더욱 그러하다. 조선조의 미인들처럼 품위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유혹적인 데가 있다. 감추기 보다 드러낸다. 소나무숲길을 가다 늠름한 적송의 한 허리를 슬쩍 안아보라. 그대의 품에 고요히 안길 것이다.
나는 가끔 고향에 들르면, 만사를 떨치고 혼자 솔숲을 찾는다. 솔숲을 찾는다지만 따로 찾을 일은 없다. 사방이 다 소나무숲이니까. 초당동에 몸을 대고 사는 수종 중에 7할이 넘는 나무가 소나무다. 잠시 잠깐 쉬는 땅이면 어김없이 거기에 소나무가 있다.
마을 동향엔 나룻배 모양의 긴 소나무숲이 있다. 이 숲은 하평과 맞닿은 곳에서 북쪽인 아랫마을을 향하여 길게 3킬로미터 가량 흘러가다 멈춘다. 수령 100년을 넘는 나무들이다. 이미 작고하신 내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초반 무렵에 심어진 것들이라 하셨다. 동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해풍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심어 가꾼 것들이다.
초당동의 서향 역시 방풍의 역할을 하는 소나무군이 있다. 경포대는 초당동의 서북향에 있는데 거기에 올라보면 경포호수 건너 초당동을 만날 수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는 경포대에서 바라본 ‘초당 취연’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저녁 무렵 초당 마을에 밥 짓는 굴뚝 연기 뭉깃뭉깃 오르는 모습을 서술한 구절이다. 그러니까 정철이 살던 시절, 초당의 서향에 소나무가 있으되 그리 성장하지는 못한 듯 싶다.
그러나 대관령에서 만들어지는 높새바람 탓에 초당동 사람들도 이쪽 대관령과 마주하는 서향을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경포호수를 둘러싸고 있는사유림은 모두 소나무숲이다. 100년을 넘긴 장성한 나무들이다. 그러고 보면 초당동은 북방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소나무숲길, 그중에서 특히나 동향에 있는 나룻배 모양의 숲길과 서향의 호수를 둘러싼 소나무숲길이 특히 좋다.
나는 조용히 송림 속으로 마치 밀정처럼 잠입한다. 아름드리 거송들이 딛고 서 있는 솔버덩길은 깨끗하다. 주저앉는다 해도 흙 먼지 하나 묻지 않을 만큼 굵은 모래로 깔려 있다. 정갈하다. 그런 지면을 밟고 선 소나무들의 아랫도리 목피는 진한 갈색이다.
그러나 그 상반신부터는 살결이 붉은 홍색이다. 마치 술 한 잔을 잘 마시고 불콰해진 몸매로 서 있는 여인의 나신을 닮았다. 방금 호숫물에서 또는 바닷물에서 미역을 감고 걸어나오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기나긴 행렬처럼 초당동의 소나무들은 그 자태가 에로틱하다. 달뜨는 그윽한 밤, 소나무들의 붉고 우아한 몸매를 볼라치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여인들만이 사는 나라에 성큼 들어선 듯 때로 무안함마저 느낀다. 슬며시 바람이라도 불면 나무들은 정염을 이기지 못해 서로 몸을 부비며 신음소리를 낸다. 삐걱삐걱, 몸과 몸이 뜨겁게 부딪힐 때에 새어나오는 소리인 줄 알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또 어찌 보면 초당동의 소나무들은 정결하다. 북향의 눈과 서향의 바람을 이기고 난 고절의 운치가 있다. 험난한 인생을 참고 견뎌낸 쓰라림이 아니다. 그들과 마주 하여 생애를 쉬지 않고 싸워낸 향기이다. 그러기에 솔잎 사이로 흐르는 솔바람 소리는 서늘하면서도 때 묻지 않아 고결하다. 그것은 거문고나 가야금이 만들어내는 소리 빛깔과 다르다. 제 몸의 군살을 모두 깎아내고 깎아낸 고택의 안주인 말씨처럼 결기가 있다.
초당동의 소나무들은 나무로써의 군더더기가 없다. 12미터 높이 위에 간촐히 거느린 솔가지를 제외하면 곁가지 하나 없다. 청빈하다. 교산 허균에게서 보듯 소나무의 이념에 투철하다.
(교차로신문 2010년 4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