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고 왜 외롭지 않겠는가
남자라고 왜 외롭지 않겠는가
권영상
처남 내외는 미국 이민자다. 그들은 결혼을 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건너가 치과 개업을 했다. 본디 부지런했던 이들이라 하루도 쉬지 않고 허드슨 강을 건너 출퇴근을 했다. 나라를 바꾼다고 그들의 한국인 본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국내에 볼일이 있을 때면 처남 내외는 가족과 함께 가끔 우리 집에 들렀다. 그들은 늘 활기차 있었고, 아이들 교육에 열성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 가족에겐 별 문제 될 거라곤 없어 보였다. 남들처럼 행복해 보이는 그런 가족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전부터 그들에게서 종종 전화가 건너왔다. 이혼하겠다는 거다. 그들이 이혼해야 한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쉰을 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고, 모를 것들도 있었다. 이혼이란 대부분 그들의 이불 속 문제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그 점 때문에 나는 대부분 ‘응’, ‘그래’, ‘그래서?’, ‘그리고?’ 이런 짤막한 대답과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내면 속 감정을 내가 알 수 없는 말로 이야기했다. 몇 십 분이고 들어보지만 나는 그들이 왜 이혼을 해야하는지 딱, 꽂히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한 가지 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있었다.
“제가 같이 놀아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건 무심코 던진 처남의 아내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처남이 제 아내를 보고 ‘언제 나랑 같이 놀아준 적 있냐?’고 한 말을 내게 옮긴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속으로 픽, 웃었다. 아니, 유치원생인가. 놀아주게. 사십 후반 나이에 아내가 저랑 놀아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웃고 말았지만 그냥 넘길 말이 아닌 듯했다. 아이들 키우랴, 가족을 먹여 살리랴,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마음을 쓸 시간조차 없었을 게 분명했다. 기댈 곳 없는 이국 생활의 고통 때문에 이중적인 중압감에 시달리며 살아왔을 거다. 그런 걸 생각하면 처남이 왜 유치원 아이들 같은 말을 내놓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남자의 내면에는 가부장적 권위 의식이 있다. 그러기에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걸 겉으로 내놓는 걸 비굴하게 생각한다. 좀 힘들어도 혼자 해결하는 걸 미덕으로 여긴다. 그런 걸 혼자 끙끙대지 말고 대화를 하자고 하지만 막상 그런 말을 내놓으면 생각이 빈곤한 남자라는 모멸감을 받기 십상이다. 남자가 쩨쩨하느니, 옹졸하느니, 그런 놀림만 받고 물러나는 게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남자는 같이 놀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남자는 외롭다. 남자가 외로울 때 처음으로 의지하는 게 술이다.
그러나 술은 약물이 아니다.
술이 깨면 외로움은 더 크다. 남자들은 불쌍하다. 외로움을 풀어낼 방법조차 모른다. 남자의 외로움은 여자와 달리 해머로 잔등을 맞은 것처럼 깊고 울림이 크다. 언젠가 길을 가다 쿡, 쓰러지고 말 만큼 충격이 크다. 왜냐하면 외로움을 오랫동안 쌓아만 왔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들은 우스개 이야기이다. 외국의 한 여기자가 한국 ‘아줌마’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가정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라고. 아줌마가 대답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어떤 학원에 다녀야 할지를 결정한다. 남편이 입을 옷과 넥타이를 골라주고, 남편이 몰고 다니는 차종과 색깔을 결정한다. 이사를 가면 이사 가 살 집을 고르고, 외식할 날짜와 음식의 종류를 결정한다.
그 말에 여기자가 그럼, 당신의 남편은 가정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라고 물었다. 아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인류평화를 위해 고민한다."
이 우스개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는 무얼까. 한 가정 속에서 한국의 남자가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이란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국 남자가 왜 외롭지 않겠는가.
(교차로신문 2010년 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