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만들어놓은 노란 오줌 구멍
눈 위에 만들어놓은 노란 오줌 구멍
권영상
저번에 눈이 많이 왔다. 적설량이 25.8센티미터나 됐단다. 103년 어쩌고 하는 걸 보면 큰눈은 큰눈이다. 그 눈이 내리고 오늘 두 번째로 우면산에 올랐다.
집 앞 느티나무 오솔길을 걸어 나가는데 눈 위에 노란 오줌구멍이 있다. 테두리가 노랗다. 노란 도너츠. 어린 사내아이가 요기에 서서 쪼르르 오줌을 누었겠다. 나는 픽, 웃으며 그 노란 오줌구멍을 슬쩍 들여다 봤다. 두더지나 들쥐가 숨어있다가 빠꼼히 올려다볼 것 같다. 20여 센티미터나 눈을 뚫고 들어간 노란 오줌 구멍 안이 컴컴하다. 나이 먹은 내 몸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던 동심이 슬그머니 깨어난다.
사실, 그런 경험은 다 있지 않은가.
소년 시절, 눈길을 걷다보면 하얀 눈 위에 뭔가 자신을 표현해보고 싶은 심리. 엉덩이 사진을 찍거나, 온 몸을 눈 위에 던져 전신 사진을 찍거나,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길을 다시 걸어가거나…
그런 경험들 중에 눈밭에 오줌 누기가 있다. 눈밭에 오줌 누기는 겨울철 사내아이들의 재미난 놀이 중의 놀이이다. 오줌줄기가 눈 위에 닿는 순간, 하얀 눈이 노래지는 색채 변화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거기다가 신속하게 눈을 녹이며 파헤치고 들어가는 오줌 줄기의 저돌적 현상도 놀랍다.
눈 위에 서서 오줌을 누는 단순한 행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다 창의적으로 발전한다. 오줌줄기를 휘휘 내두른다거나, 눈 위에 글씨를 써보는 쪽으로 이동한다. 하얀 눈밭을 향해 멀리, 더 멀리 오줌을 쏘아대기도 한다. 허리를 앞으로 불쑥 내밀어 멀리 오줌을 쏘는 그 유머 가득한 소년의 몸짓.
이 발칙한 행위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순수한 밑바탕에 유희 본능이 있을 듯하다. 손을 써서 그림을 그리고 집을 짓듯 자신이 가진 신체의 일부분을 써서 즐겁게 노는 행위는 놀이 본능에서 왔을 듯 싶다. 배뇨하는 시간은 짧다. 그리고 일회적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도발적이게도 눈 위에 제 지엄한 이름을 쓰거나 성스런 종교 기호를 그리는 것은 모두 놀이 본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으면 설명할 길이 없다.
원시와 같은 하얀 들판에 서면 사내들은 누구나 배뇨의 충동을 느낀다. 간혹 높은 산 정상이나 능선에 올랐을 때도 그런 충동을 경험한다. 그것은 발 아래 펼쳐진 풍경을 제압하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이 끝났다는 안도의 표현이거나, 아니면 생물학적 행위일 수도 있겠다. 몸 안의 뜨거워진 체온을 식히려는.
등산만이 아니라 물속에 들어가도 여전히 배뇨의 충동을 느낀다. 개울물에 들어가거나 바다, 혹은 수영장의 물속에서도 여전히 배뇨의 유혹을 받는다. 맑은 물속에서 누는 오줌은 시각적이다. 샛노랗다. 노랗게 배설되어 물결과 함께 번져나가는 색채는 분명 유혹적이다. 산 정상에서의 배뇨가 수직적인 제압력을 갖는다면 수중 배뇨는 수평적인 확장력을 갖는다. 이 점을 보면 사내들의, 집 이외의 장소에서 몰래 하는 오줌누기엔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적 본능이 숨어 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이런 오줌구멍을 나는 수도 없이 봤다. 눈 덮인 산을 오르는 이들은 대부분 사내 어른들이다. 성인인 사내들이 남녀 가릴 것 없이 다 오르는 산행 길에 버젓이 배뇨를 해 놓았다. 눈 위에, 그것도 한눈에 빤하게 보이는 곳에다 그런 흔적을 남겨놓았다. 전설적인 폭설이 내리는 동안, 이 도회지 사내들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도덕적 파일이 망가진 걸까. 아니면 영역 표시를 위한 동물적 배뇨의 유혹을 참지 못했던 걸까. 눈 위 여기저기에 뚫려있는 노란 오줌구멍이 나를 소년의 기억속으로 돌아가게 한다.
(교차로신문 2010년 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