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 분배를 지향하는 노느매기
공평 분배를 지향하는 노느매기
권영상
열여덟 살 나던 어느 단풍 좋은 가을이었다.
“네가 뽑혔다.”
소문중 회의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셨다.
내가 육대조 할아버지 시제에 제수를 지고 갈 사람, 곧 요즘 말로 포터가 되었다는 거다. 두 명이 더 있는 데 내 육촌들이라 하셨다. 열여덟 나이가 가장 힘깨나 쓰는 나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육대조 할아버지 산소가 어디 있는지는 시제 당일에야 알았다.
시제가 뭐냐 하면 음력 시월 상달쯤에 5대조 이상의 조상 산소에 직접 찾아가 지내는 제사를 이른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6대조 할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말씀에 응했다.
그런데 시제 당일, 나는 그 할아버지의 산소 위치를 알고 너무도 놀랐다. 제수품을 손수레에 싣고 집에서 시오 리 떨어진 이웃마을에서 다시 등짐으로 날라야 하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험산 산길 10여 리라 했다.
이때가 언제 적이냐 하면 지금부터 4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다.
또 과거 이야기이냐며 혀를 내두를 이가 있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대안을 우리 어른들의 과거사에서 찾아보고 싶다.
이 구닥다리 같은 시제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인데 그 시제 행사의 맨 마지막에 ‘노느매기’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웃마을 초등학교에 부려놓은 제수물을 나는 내 육촌 동생과 함께 짊어지고 산길을 올랐다. 산길은 짐승들이나 다닐 소로였다. 개울을 건너고, 또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오르고, 나무뿌리를 잡거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다시 내려가거나 또 올라가는 그런 길을 두어 시간 걸어 올랐다.
구름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어드멧골’에 산소가 있었다.
죽어 산신이 되길 바라던 변형된 노장사상이나 신선사상 때문에 이 깊은 산중에 무덤이 쓰이는 듯 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그 육대조 할아버지 산소에 당도했을 때 모인 제관은 한 스무 명은 되었다.
우리는 묘전제사(산소 앞에서 지내는 제사, 줄여서 전사라고도 함)를 지냈다.
그리고 점심 겸 음식을 들었다.
‘노느매기’는 이럴 때, 그러니까 다들 묘전제사가 끝나고 음식을 들고 있을 때, 제사에 쓰인 제수물을 나누는 일이다. 이 일은 남은 제수음식을 참례한 제관의 머릿수로 어림하여 공평하게 나눌 줄 아는 분이 맡았다.
노느매기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제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 사정과 그 집안이 시제에 투자한 내역도 알아야 한다. 노느매기를 공정하게 하는데 있어서 고려할 점이 또 있다. 식구가 많은 지, 가정 사정이 여의치 않은지, 연세 많은 어른이 계신지, 우환 중에 있는 분이 계신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노느매기는 아무나 맡아서 할 수 없다.
게다가 분배할 제수음식의 종류도 단순하지 않다.
대추 밤과 같은 삼실과나 약과 다식 등은 현장에서 소비한다. 노느매기의 대상은 절편, 어물, 육전이나 산적이다.
음식 먹는 일이 다 끝나면 배분해 놓은 몫을 가운데에 두고 다들 빙 둘러선다.
“이건 자름댁 몫이고, 이건 봉산댁 몫이고, 또 이건 진수씨댁 몫이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노느매기한 몫을 나누어 준다. 그 이유는 몫을 그집 정황에 맞게 잘 배분했는지를 공개적으로 확인받기 위해서다.
“봉산 댁엔 자리에 누운신 어르신이 계시는데…….”
누가 그렇게 그 집 사정을 귀띔해 주어 공동체 구성원의 동의를 받으면 음식은 더 보태지기도 하고 덜어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민주적인 방식의 나눔 문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시제는 문중공동체 문화다. 그러니까 물론 시제에 참여치 못한 문중 구성원도 노느매기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살던 ‘아랫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지만 각성받이들도 함께 산다. 비록 그들이 문중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어도 예의상 그들에게도 노느매기의 혜택을 드린다.
노느매기란 말은 내 나이 십대 후반 시제에서 들어본 뒤 나는 그 후로 까맣게 잊어버고 살았다. 국어사전에 노느매기란 낱말이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마치 40여년 전의 부모님 시대로 돌아간 것만큼 반가웠다. 거기에 적혀있는 노느매기라는 낱말의 뜻은 물건을 여러 몫으로 노느는 일이다. 노느매기는 ‘노느다’와 ‘매기다’가 명사형으로 합성된 말이다. ‘노느다’는 물건을 여러 몫으로 가르는 것을, ‘매기다’는 평가하여 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노느매기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집 사정을 두루 판단하여 배분하는 양을 공평하게 정하는 일이다. 농경사회의 공동체 문화가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눔 문화가 아닐까 한다.
노느매기 문화는 곡물이나 돈을 대어 공동으로 만든 음식이나 수확물 분배에 주로 활용된 듯 하다. 시제뿐 아니라 마을 서낭제에도 이런 문화가 있다.
우리 ‘아랫마을’이 모시는 신 중에 ‘골매기 서낭신’이 있다.
대관령에서 흘러내려 강릉 지방을 관통하는 내를 남대천이라 한다. 남대천은 동쪽으로 흘러 송정에서 다시 바닷가 마을인 안목을 거쳐 바다로 든다. 그런가 하면 이 물줄기의 또 다른 일부는 강릉의 동쪽인 하평 논벌을 적시고 왼쪽으로 굽이쳐 경포호수의 하류로 빠져나간다. 옛 사람들은 이렇게 굽이쳐 내려온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땅의 기운을 물이 송두리째 거두어 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형국을 막기 위해 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지점에 세운 것이 ‘골을 막는다’는 골매기 서낭당이다. 참 절묘한 아이디어다. 실제로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곳에 서낭당을 지어 물의 흐름을 늦추었고, 그 효과로 흙의 유실도 확실히 막아냈다.
인근 강문의 해랑신이 여신이라면 골매기 서낭신은 남신으로 ‘아랫마을’에 사시는 우리 아버지 삼 형제분과 거기에 논을 대고 사는 몇몇 농가가 지금도 모시고 있다. 이 분들이 집안 아녀자 중에 월경 없는 날을 골라 제사 모실 날을 잡고, 제수 비용을 공동으로 갹출하여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대개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의 문턱에서 모셨다.
이때에도 제사가 끝나면 아버지는 노느매기 음식을 가지고 오셨다.
언젠가, 서낭제를 끝낸 뒤의 노느매기 풍경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서낭 제사가 끝날 무렵부터 비가 내렸다. 컴컴한 밤, 바람이 거칠고 냉하여 노느매기를 서낭당 주변에서 할 수 없었다. 그 때에 특정 집에 모여 음식도 들면서 남은 음식을 나누었다.
방에 기름종이를 깔고 음식을 분배한다. 일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제 때와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몫을 만든다. 그건 마치 슈마트라 섬 토족들이 공동으로 상어를 잡았을 때 그 일에 직접 참여한 사람뿐 아니라 마을사람 모두에게 몫을 배분하는 방식과 같다. 우리의 노느매기도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당연히 차례가 가도록 분배한다.
한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에서도 노느매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함께 벼농사를 지은 두 형제의 이야기다. 동생은 식구가 많은 형을 생각하고, 형은 살림을 갓난 동생을 생각하여 자신들 낟가리의 볏단을 몰래 서로의 낟가리로 옮겨놓는다.
이때의, 동생은 자식이 있는 형의 형편을 고려하고, 형은 살림 장만에 고생할 동생을 고려하여 그만큼의 볏단을 더 가져다준다. 이 '더 가져다 주는' 바탕에 공평배분의 노느매기 정신이 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소득 재분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바가 아닐까 싶다. 형편이 넉넉하면 좀 덜 받아도 되고, 형편이 넉넉치 못한 이라면 좀 더 얹어주는 방식.
내가 하고 있는 주말농장에도 지난 해 그런 분들을 보았다.
올케 시누이가 함께 같은 땅을 분양받아 함께 경작하고 산물을 함께 나누는 경우다. 이들은 비록 똑 같이 투자를 하였어도 식구 수나 가정 형편을 그들의 배분기준으로 삼았다. 이 배분의 바탕에 노느매기 정신이 있다고 보겠다.
노느매기에는 가정이 넉넉지 못하여 노동력이나 금전을 투자하지 못한다 하여도 그 과실을 함께 나누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일정량을 집집마다 똑 같이 나누는 것이 가장 공평한 듯 하지만 아니다. 노느매기는 그 불합리를 뛰어넘어 개개인의 가정적 정황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매우 공정하다. 또 그 배분에서 구성원 전체의 동의를 구한다는 점이 매우 민주적이다.
노느매기의 배경엔 공유와 공평,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철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