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다 돌아간 사람, 김진평씨
잘 놀다 돌아간 사람, 김진평씨
권영상
“구부러진 노송남근
바람에 산들거리고오.
허공중천 뜬 달은
사해를 비춰 주누나.”
내가 진평씨 집에 도착했을 때다.
진평씨 집 마당 고욤나무 그늘에 춤이 한판 벌어지고 있었다. 그늘에 깔아놓은 부들자리 가운데에 진평씨가 앉아 장구채를 휘두르며 신고산타령을 부르고 있었다. 거기 그 장단에 맞추어 동네 남자들 서넛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어떤 이는 두 손에 신발을 집어 들고, 또 어떤 이는 한 손에 든 맥고모자를 빙빙 돌리며 엉덩이를 실룩댔다.
나는 그들 춤판을 깨지 않으려고 진평씨 집 길가 사철나무 울타리에 서 있었다. 반쯤 술에 취해 추는 춤도 춤이지만 진평씨의 신고산타령이 무엇보다 구성졌다. 그의 ‘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건 아니지만 목청이 들어볼수록 좋다. 목청이 훅 터져 울려나는 것이 마치 대나무 통 속 같이 걸림 없었다. 목이 열려 그런지 소리가 위로 올라갈수록 시원시원했다. 그는 그 길고도 유장한 노래를 그럴싸하게 불러대고 있었다.
그는 신고산타령 중에서도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에.’ 보다도 이 둘째 절을 흠모했다. 바람에 몸을 내맡겨 흔들흔들 흔들리는 노송을 좋아했고, 사해를 비추는 허공중천에 뜬 환한 보름달빛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어도 진평씨의 이 구성진 노래를 들으면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다. 그의 노래에선 사람의 심정을 뒤흔드는 소리가 있었다. 바람이 노송을 후려치듯 가파른 산을 메어치듯 때로는 거대한 바위를 넘지 못해 머뭇거리듯, 그의 소리는 길어졌다 다급해졌다 아주 사람의 심정을 뒤흔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신이 들린 사람 같다.
마흔 줄에 들어선 그의 생애가 하도 곡절이 많아 그런 것 같았다.
잔뜩 기울어진 진평씨의 단칸 초가를 바라보았다. 노래와 춤사위에 기울어진 초가가 벌떡 일어나 앉아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내게 맛보러 오라고 한 그 고깃국 R끓는 냄새가 요란하게 풍겼다.
“아, 이보게. 기어이 와 주었구만.”
노래가 끝날 무렵, 진평씨가 나를 본 모양이다.
장구채를 던지더니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사철나무 울타리를 돌아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스무 살을 넘겨 먹은 나를 맞아주었다.
그 날이 사월 초파일이었다.
어머니도 셋째백모님도 그날은 모두 집에서 50여리 떨어진 주문진 장덕리에 있는 절로 부처님을 보러 가셨다. 부처님 전에 바칠 쌀을 이고, 버스를 타고, 때로는 산길을 걸어서 가시는 그 먼 길이 부처님을 찾아뵙는 아름다운 고행의 길이었다.
“몸을 깨끗이들 해라.”
어머니는 이 날이 오기 한 달 전부터 우리들에게 타이르셨다.
나쁜 걸 보지 말고, 나쁜 일을 저지르지 말고, 나쁜 말을 하지 말고, 나쁜 행동거지를 말고, 나쁜 생각을 말고, 나쁜 걸 먹지도 말라.
나는 그 말씀에 따라 길을 가도 조심히, 말을 할 적에도 조심히, 다툼이 있는 데는 가지 않았다. 그게 어머니 말씀이기 때문도 하지만 나도 그쪽에 많이 경도 되어 있었다.
그 초파일을 맞추어 아버지는 읍내에 사돈어른을 만나러 단정한 차림으로 가셨다. 우리 뿐 아니라 우리 여섯 집 있는 ‘아랫마을’은 그렇게 해서 텅 비거나, 비었지만 뭔가 경건한 기운이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그 진평씨는 그런 동네 분위기를 전혀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진평씨가 우리 집에 나를 찾아왔다.
“이보게. 영상씨!”
나는 스무 살 나이이고, 그는 마흔 줄을 넘긴 나이인데도 키가 서발 같이 큰 나를 영상씨! 라고 불렀다.
“이따 우리 집에 개장국 먹으러 오게.”
그가 다짜고짜 그랬다.
이게 무슨 망발이고, 망언이고, 발칙한 도발인가.
“아니, 진평씨!”
숨넘어갈 듯 한 나의 표정의 보더니 그가 손을 내저었다.
“알았네. 왜 놀라는지. 혹 오고 싶음 오게.”
내가 아무리 남들보다 술과 담배를 일찍 익히고, 놀기를 즐겨온 나이라 해도 그가 말한 개장국, 그러니까 보신탕이라는 음식에 익숙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 당시 나의 종교적 신념으로 보아서도 그랬다.
나는 집을 나가는 진평씨의 뒷등을 향해 뇌까렸다.
“이 대역무도한 놈.”
다른 날도 아닌 초파일에 하필이면 보신탕 추렴이라니.
욕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알기로 진평씨는 종교와 무관한 인물이었다. 인물이 워낙 놀기를 좋아하여 놀고 쉬는 날을 가리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 자의 반역적 행동이 밉광스러웠다.
진평씨는 누구인가.
우리 ‘아랫마을’에 이사 온 뜨내기다. 그러니까 우리 마을과는 정서가 다른 이질적인 인물이다. 본디는 강릉의 내곡동 어느 골짜기에서 태어나 구름을 먹고 골짝 물을 먹고 살았다 한다. 그가 매양 구름만 먹고 살기에 너무 배가 고파 열다섯 나이에 트럭을 따라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었다. 구름만 먹고 살았으니 그의 말처럼 그는 당연히 ‘무학이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단 한번 가본 적이 없지만 그는 글을 읽었고, 눈썰미로 타령을 배웠고, 장구채를 잡으면 신들린 듯이 장구를 쳤다.
뜨내기들이 그렇듯 그 또한 뻥이 심했고, 말의 반은 구라였다. 그는 그의 말대로 일찍이 ‘조선 팔도’를 트럭을 따라 여행 삼아 굴러다니다가 마누라를 얻었고, 자식 둘 낳아 데리고 우리 ‘아랫마을’ 고욤나무 집으로 왔다.
이 고용나무집이 또 어떤 집이냐 하면 예전 나의 큰백부님께서 조용히 인생을 음미하며 사실 요량으로 집 뒤에 따로 지은 누옥이다. 달랑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딸린, 불알 두 쪽을 염두에 두시고 지은 초가집이다. 톱이나 대패질 한번 없이 생긴 그대로 구불구불한 나무로 만든 반쯤 기우뚱한 그야말로 오막살이집이다.
큰백부님 나이가 차셔서 저승에 가신 뒤, 진평씨는 마침 그 빈 집을 얻어 식솔을 데리고 왔다. 진평씨는 허우대가 몹시 좋은 장골이었다. 팔로군의 앞잡이를 시킨 대도 흠없을 만큼 늠름한 기골의 사내였다.
트럭을 따라다니는 팔도를 누빈 탓인지 그의 행동거지는 유난히 자유로웠다. 능청스럽다면 능청스럽고,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방정맞다면 또 방정맞았다. 그가 규격화된 국정교과서 공부를 접하지 않은 탓 같았다. 흥에 겨워 자유자재로 소리를 왜곡하거나 장구 또한 제멋대로 치는 듯 해도 멋이 있고 아주 그럴 듯 했다.
“노는 박사야.”
다들 그와 한번 술을 마시고 돌아오면 그렇게 그를 평했다.
술도 거냥 먹지 않았다. 술집에서 먹든, 노상에서 먹든, 경포 호수에 배를 띄워놓고 먹든 그의 손에 술잔이 쥐어지면 그는 능란한 목청으로 타령을 불렀고, 걸판지게 춤추거나 뻥을 쳐 사람 정신을 빼놓았다.
“이보게. 내가 오늘 대학생인 그대에게 보신탕을 먹으러 오라 한 거는.”
그때 나는 고향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견공을 부처님께 바치고 싶었던 거네. 요번 세상엔 나는 사람으로 나왔지만 다음 세상에 개로 태어난단들 나는 서글퍼하지 않을 걸세. 개장국을 먹어도 내 몸에선 매일 같이 부처가 태어나시네.”
그는 그런 능란한 술수로 나를 꾀어 보신탕을 권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에게 현혹되어 생애 처음으로 보신탕을 입에 대었다.
“진평이란 사람 근면한 사람이 아니야.”
아버지는 그이와 내가 만나는 걸 아시고는 그렇게 나를 경고하셨다.
그 말씀이 영 틀린 말씀은 아니다.
그야말로 그는 일보다 놀기를 즐겼다. 백 일을 일한다면 이백쉰 날은 노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우리가 보기에.
그 후 나는 가끔 길에서, 또는 일하는 밭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힘이 좋아, 일꾼 중에 상일꾼이었다. 감자 한 가마를 너끈너끈 짊어지고, 아홉 자 소나무도 너끈히 어깨에 메었다.
남의 궂은 일이라면 마누라가 아이를 낳아도 손발을 벗고 나섰다.
“내가 아님 누구도 그 일 못한다니까.”
만류하는 아내를 그는 그런 말로 뿌리쳤다.
근방에 진구형님네 불이 났을 때다.
불구덩이 속에 제일 먼저 뛰어든 사람이 진평씨였다. 그는 불속에 들어가 술에 취해 누운 진구 형을 건져 나왔다. 그는 팔로군처럼 힘이 좋았다. 놀기만 잘 노는 게 아니라 의협심도 강했다.
일생 번 돈으로 지은 진구형 집은 새까맣게 탔어도 진구 형은 그 덕분에 살았다.
“아니, 불구덩이 들어갈 때 안 무서웠어요?”
그렇게 물었을 때 다들 그의 말에 놀랐다고 한다.
“그기 사는 재미지 뭐.”
그는 목숨에 대해 그렇게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사람을 구해내는 일을 재미라고 했다.
방 하나 부엌 하나, 말 그대로 단칸방에 자식 둘에 네 식구가 살면서도 그는 바장대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이 없었으니 그에겐 재산 욕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무학이었으니 뭘 해도 으스대거나 자신을 내세울 일이 없었다. 그는 인생을 온전히 놀이하듯 재미로 생각했다. 그는 구실만 있으면 좁은 단칸방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놀기를 즐겼다.
“잘 놀다오라는 숙제를 받아가지고 왔지.”
그는 마치 놀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 같았다. 하늘이 내주신 숙제를 잘 하느라 그는 남들 다 가는 학교도 못 가고, 트럭 조수 노릇을 하며 마음대로 놀아보았다고 능청을 떠는 인물이 진평씨다.
그 시절의 이념이 ‘성실과 근면’이었는데 그는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리고 남들 다 죄악시 하는 놀자주의자였다.
그렇게 저렇게 사는 동안 나는 직장을 얻어 고향을 떴다.
언젠가 그의 고욤나무 집에 가보니 마당에 마차가 한대 서 있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물었다.
“돈 받고 사람들 태워 경포를 돈다더라.”
나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혼자 웃었다.
마차를 몰며 흥얼흥얼 신고산타령이나 품바타령을 할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옛날, 하필이면 사월 초파일에 내게 보신탕을 먹이려던 그의 의도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너무 종교에 얽매이면 사람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그때, 한창 젊어가는 내게 일깨워준 듯 했다. 하여튼 그 후부터 나는 부처님 곁을 떠나 우리 동네 침례교회당을 열심히 다녀도 보고, 서울에 와선 이태원에 있는 무함마트 사원을 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이의 매임없는 짓이며, 노동조차 장구채를 쥐고 타령을 부르듯 하는 그의 삶을 떠올려 보곤 했다.
실제로 그가 일하러 가는 곳이면 사람들이 꾀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웃음바다로 이끌었다. 그가 웃기는 바람에 일을 좀 덜한 대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웃음에서 얻은 것이 더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젯밤이다.
이승에 가 잘 놀다오라는 숙제를 받아왔다는 진평씨가 생각났다.
퇴직을 하여 아무리 잘 놀아보려 해도 노는 재미를 모르겠어서 한 수 배울 생각이 일어났다. 나는 고향 조카에서 전화를 걸어 진평씨에 대해 물었다.
“갔지 뭐. 한 사오 년 될까.”
그에 대한 말을 꺼내자마자 그 대답을 했다.
“한 마디로 해 그 사람, 어떤 사람 같아?”
슬쩍 조카의 마음을 떠봤다.
“노는 박사지 뭐.”
조카가 대뜸 그랬다.
전화를 끊고 그를 다시 생각했다.
“노는 숙제를 잘 마치고 가다.”
혹시 그의 묘비에 그런 비명이 쓰여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