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2012. 10. 16. 16:43

 

‘빽’

권영상

 

 

 

동료들끼리 둘러서서 담배 피는 도막 시간이 있었다. 그 중에 ‘빽’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같이 밝은 세상에 뭔 빽이 있느냐고 나는 서슴없이 말 사품에 끼어들었다. 내 말을 듣자, 모두들 아연했다. 순진해도 참 너무 순진하다는 거다. 여름날, 소문난 냉면집에 가 제때에 냉면 한 그릇 먹고 나오려 해도 빽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이거야 순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이 험난한 세상에 빽 없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게 중론이었다.

 

 

정말이지 요 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퇴근을 하느라 서울역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젊은 여자의 전화 통화가 요란을 떨었다. 30대 초반의 미혼인 듯 한 나이였지만 그의 목소리 톤이 굉장히 컸다.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걸음 보폭이 나와 너무 비슷했다. 얼핏 듣기에 위중한 환자를 태워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이와 다급하게 하는 통화 같았다.

“그렇게 급한 거면 말이야. 혹시 아는 의사나 친구 중에 의사 아는 사람 있나 알아봐!”

전화를 하는 여자의 목소리도 다급했다.

 

“빽, 빽! 빽 말이야. 그러니까 인맥!”

저쪽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이쪽에서 ‘빽, 빽! 빽’을 연발했다. 길거리의 차들 소음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사태가 위급하다는 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마저 없다면 혹시 내과의사 아버지를 둔 아들이나 딸을 안다든가, 또는 그들의 친구를 안다든가, 아니면 초중고 대학 동기들 중에, 그런 친구를 더듬어 보든가, 아니면 안면이 없더라도 의사 하는 동창이나, 없으면 선배나 후배.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야 쉽지. 빨리 생각해봐. 하다못해 구의회 의원이나 아니면 국회의원 정도면 좋고말고 하지만 말야.”

나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졌다. 흘끔 그녀를 봤다. 목소리는 높지만 그녀의 차림새로 보아 교양 없는 여자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차츰 빨라졌다. 나도 덩달아 빨라졌다. 이제는 그녀의 전화 속 상황에 내가 끌려드는 형국이었다. 이쪽의 여자가 주변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의 위중한 일이라면 차라리 그 일에 몰입하는 그녀가 훌륭해 보이기도 했다. 그 누군가를 위해 저렇게 체신이 깎일 만큼 그 일에 뛰어들어 헌신적인 도움을 주어 본 적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병원에 한번 가려면 예약을 해놓고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누구’ 때문에 보란 듯이 단시간에 진료를 받고 돌아오거나 입원을 했다는 말도 더러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냥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 하는 말이거니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이 전화통화를 들어보면 그게 사실 같기도 했다. 

어떻든 질병도 강해져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병이 많고, 사고도 갑자기 당하는 무서운 재난이 많다. 그걸 생각하면서 나도 전화 속 사람이 데려가는 환자가 어떻든 원하는 병원에 제대로 입원해 주기만을 빌었다.

 

그런데 서울역 서쪽 역외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갈 때다. 나는 그녀의 통화를 또 한번 들었다.

“병원 취직이라는 게 그렇게 쉽니!”

그녀가 소리쳤다.

아! 하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병원으로 급한 환자를 태워가는 게 아니라 통화의 상대방이 지금 병원 취업을 위한 면접쯤을 보러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허방다리를 찧은 기분으로 그만 걸음을 늦추고 말았다. 그랬지만 궁금증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통화의 그쪽 상대방은 누굴까. 의사로 취업을 하려는 걸까. 간호사일까, 아니면 병원 출납일을 하는 원무과 요원일까. 내과의사를 둔 친구의 빽이 필요하고, 구의원이거나 국회의원쯤의 빽이 필요한 그 사람은 지금 어느 부서에 취직을 하려는 걸까. 세상을 쉽고 빠르게 사는 법을 알려주던 그 30대의 여자분은 어떤 분이길래 그 나이에 벌써 그런 걸 터득했을까. 어떻든 간에 누군가 주변의 비호 세력이 없으면 내 힘으로 취업 하나 하기도 어려운 게 우리 사회인 모양이다.

 

젊은이들의 취업이 갈수록 힘든 시대다.

자녀가 취직을 했으냐고 물으면 그게 징역 15년감이라는 우스갯말을 들었다. 그만큼 취직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와 있다. 그 어려움이 '빽'으로 인해 더욱 가중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