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게 시계들은 저마다 시간이 다르다
시계가게 시계들은 저마다 시간이 다르다
권영상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다. 마땅한 하숙집이 없어 직장 동료와 같은 집 같은 방을 쓴 적이 있었다. 기껏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밥 먹고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여 잠자고.... 그럴 테니까 같은 방을 쓴단들 뭔 문제가 있을까 싶어 한 방을 쓰기로 했다.
근데 살아보니 그와 나는 수면시간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밤 9시, 9시 뉴스 시보가 울리고 “전두환 각하께서는 오늘 오전......”
아나운서의 멘트가 막 나오는 순간, 이불을 펴고 잠이 든다. 하루도 그 일을 어긴 적이 없었다. 급기야 나는 그의 잠을 “땡전 잠”이라 했다. 시보가 땡, 울리고 ‘전두환 각하께서’의 ‘전’이 나오면 잠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땡전 잠’ 때문에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밤이면 잠긴 문을 못 열어 직장의 숙직실을 이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잠은 새벽 4시면 깬다. 새벽 4시는 내가 자정을 넘겨 한창 깊은 잠에 빠져들 때다. 깔끔한 그는 그 시간에 깨어나 수돗물을 틀어 요란히 세수를 한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와 라디오를 켠다. 그는 라디오 듣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는 그렇게 아침에 내가 깨어날 무렵까지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런 그와 한 달을 간신히 넘기던 날이었다.
“권선생, 저와 한 방에서 사시기 힘드시지요?”
그는 자신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수면 시간 때문에 겪게 되는 나의 고충도 분명히 알았다. 그런 까닭에 가끔 내게 미안해했다. 결국 그는 내가 떠나주기를 그런 식으로 간곡하게 말했다. 그는 나보다 4살이나 많았다. 이 좁은 산간마을에서 내가 저를 외면하고 떠난다면 그도 나도 불편하리라는 걸 심각하게 고민 한 결과였다.
나는 그의 청을 받아들이고 끝내 그와 작별했다.
그때 그는 분명히 나와 너무도 다른 시계를 가지고 살았다.
요즘 나의 퇴근길이 바뀌었다. 국제전자센터 지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다. 내가 지나쳐가는 상가에 시계가게가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계들, 유리상자 속에 디스플레이해 놓은 손목시계들까지 무수히 많다.
그 시계들을 볼 때마다 나는 놀란다. 아니 처음엔 좀 낯설었다. 그 많은 시계들의 시간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계가게 시계들 시간에 저마다 다를까? 그게 너무나 나를 낯설게 했다. 대충 봐도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라곤 없다. 처음엔 이 사실이 충격적이었지만 볼수록 재미있었다.
이 시계 가게의 시계들과 달리 시계가게 바깥의 시간은 어떠한가.
아침 6시면 방송 3사가 일시에 시보를 울리고 애국가를 튼다. 애국가를 방영하는 시간이 다를 수 없다. 그리고 정시마다 한 치의 오차없이 시보를 울리고 뉴스를 내보낸다.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는 뉴스 시간을 안다. 그래서 뉴스를 듣기 위해 벽시계의 시계바늘이 정시에 도달하기를 기다려 텔레비전을 켠다.
똑 같은 그 시각에 열차는 뜨고, 비행기가 이륙한다. 어김없다. 그렇기에 그 시각을 향해 수많은 승객들은 똑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
똑 같은 시각, 낮 12시면 점심 시간이다. 똑같은 시간을 가졌기에 우리나라 사람 모두는 하던 일을 놓고 벌떡 일어선다. 점심 식당을 찾아가는 사람들로 길거리는 붐비고, 차들은 막힌다. 우리나라가 다 그렇게 일시에 움직인다. 우리나라 사람만이 이 12시에 점심을 먹는가? 아니다. 우리가 일본의 동경 135도를 표준시로 삼고 있으니 그쪽 사람들까지 1,2억의 사람들이 12시에 모두 숟가락을 든다.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손목시계나 휴대폰의 시간이 다 똑같이 12시에 가 있으니까. 다 똑같이. 우리는 모두 다 똑 같은 시각에 목매여 산다.
나라고 별종인가. 표준시가 싫으면서 나도 표준시의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이다. 가끔 손목시계를 차고 출근할 때면 시계의 시간부터 맞춘다. 손을 바르르 떨면서 초침까지 맞춘다. 주말농장에 갈 때엔 내 승용차에 박힌 시계의 시간도 내 휴대폰과 똑 같은 시간으로 고친다. 승용차나 손목시계의 시간은 내가 안 보는 사이 자유로이 시간의 강물을 흘러간다. 나는 그런 서로 틀린 시간을 보면 기어이 고치고 만다.
그러나 내가 매일 퇴근길에서 만나는 시계가게의 시계들은 나와 의식이 다르다. 내가 틀린 시간이라 부를 때 그들은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틀린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시계는 다른 시계보다 5분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고, 어떤 시계는 10분이나 30분 더, 어떤 시계들은 아예 7시간이나 8시간을 더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몇 시간씩 시간을 덜 가진 시계들도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시계가게 시계들은 우리들처럼 똑 같은 시각에 뉴스를 볼 필요가 없고, 똑 같은 시각에 점심을 먹을 필요가 없다. 누구는 그 시각에 출근을 하고, 누구는 그 시각에 아침을 먹고, 또 누구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
딸아이가 대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다.
취업 준비를 하느라 오전 10시쯤에나 깨었다. 내가 아침 출근할 때면 딸아이는 한밤중이다.
“아니, 7시면 일어나야지 뭘 곧 자니?”
퇴근을 하고 돌아와도 잠 잘 때가 있다.
“어쩌려고 여태 자는 거니!”
나는 성질대로 소리치고는 했다.
그때마다 딸아이는 그랬다.
“아빠, 나는 아빠 시계가 아닌 내 시계에 맞추어 살고 있어. 아빠 그거 몰라?”
나는 그때 그 말뜻을 몰랐다. 밤 늦게까지 책을 보고, 싸이를 하고, 내가 모르는 바깥 세상과 소통을 하고 그러느라 늦는다는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들 다 일어날 때 일어나고 잠 잘 때 자야 정상 아닌가?”
나는 그렇게 오래된 고정관념으로 시간을 보았다.
나는 표준시로 세상을 오래도록 살았다. 해 뜨면 일어나 일을 하고, 밤 되면 잠자리에 누워 잠을 자는 표준시. 그러나 올빼미형 인간인 딸아이와 아내는 지금도 나와 수면스타일이 다르다.
그 일로 부딪힐 때면 나는 억지로라도 나의 생각을 바꾸려 한다.
사람은 시계 가계 시계들처럼 저마다 시간이 다른 시계를 가지고 산다. 그 시계로 그들은 그들의 스케줄을 살아간다. 왜 여태 자니? 그러며 늦도록 자는 잠을 탓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절대 그 잠이 늦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