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자장면 한 그릇

권영상 2012. 8. 27. 08:52

 

 

 

자장면 한 그릇

권영상 

 

 

여름방학인데도 학교에 일이 있어 나갔다.

일을 대충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학교 식당에 전화를 넣었다. 역시 방학이라 운영을 안 한다. 하긴 지금이 오후 2시다. 방학이 아니어도 문을 닫을 시간이다. 점심을 때우려면 신을 고쳐 신고 교문 바깥을 나가야 한다. 그게 성가셔서 어떤 땐 점심을 싸가지고 오기도 한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때 들고 다니던 도시락이 지금도 집에 있다. 거기다 밥 담고, 반찬 담고, 맨 아랫칸에 국물 좀 뜨고 그래 가지고 와 밥을 먹는 일도 좋다. 사람없는 빈 내 방에서 밥을 떠 먹는 그 고요한 일이 의미 있다. 그러나 그 일도 번거로워 한두 번 하다 솔직히 그만 두었다.

 

이제는 별 수 없다. 신을 고쳐신고 바깥 동네 식당으로 나갈 수밖에. 가볍게 해결해야지 하며 교문을 막 나설 때다.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과학 선생님이 내 사정을 듣고 음식점 한 곳을 소개해 준다.

“이 시장길을 쭉 가시다 보면 좋은 자장면 집이 있습니다.”

나는 알려준 길을 대충 짐작하고는 교문을 나섰다.

“좀 멀기는 해도 가시면 좋을 겁니다!”

내 등 뒤에다 대고 과학선생님이 다시 일러주신다.

“멀어 봤자지 뭐!”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만리동 시장길을 걸어올랐다.

 

시장길이 끝나면 청파초등학교로 내려가는 내림길이다. 그 길을 다 걸어 내려갔다. 숙명여자대학교 후문이 보이는 로타리가 나왔다. 거기서 효창공원을 끼고 오른쪽 길을 걸었다. 덥다. 자장면을 먹으러 가기엔 벌써 먼 길을 왔다. 중국음식점도 두 곳이나 지나쳤다. 또 덥다. 햇빛 가릴 책이라도 한 권 들고 올 걸.

‘아니, 뭐 얼마나 별난 자장면이길래!’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 한 사람 붙잡고 같이 이야기나 하며 올 걸, 그랬다. 그러나 2시까지 점심을 거르고 있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좀 멀다. 과학 선생님이 ‘좀 멀다’고 일러준 말이 떠오른다. 멀긴 먼 모양이다.

 

효창공원 울담 나뭇그늘을 밟으며, 길가에 즐비하게 세워둔 이삿짐 운반 차량들의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옷 앞섶을 훌렁훌렁 흔들어 땀을 식히며 여름길을 걸었다. 너무 멀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인다. 그때 마침 저쯤에서 컴퓨터를 안고 오는 청년이 있다.

“죄송하지만 이 근처에 아주 쪼끄만, 별난 자장면 집이 있다는 데 그 집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나는 과학 선생님이 말해 준 그 집을 물었다.

“조오기 조금만 더 가보세요.”

청년이 내가 가고 있는 방향 너머를 ‘조오기’ 하며 가리켰다. 별나긴 별난 자장면집인 모양이다. ‘쪼끄맣고 별난 자장면 집’이라고만 해도 알아들을 정도다. 나는 그 턱으로 가리켜준 ‘조오기’에서 그 집을 찾아내고 말았다.

알려준 대로 그 자장면집 유리 창문을 봤다. 창문엔 이런 글이 써 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단 한 그릇 먹어보고

눈물을 흘려 줄 음식을

내 혼신의 힘을 다 하여

만들고 싶다.

21세기가 기다리고 있기에.

88년 10월 이문길

 

 

나보다 먼저 와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이 그 집앞 나무의자에 앉아 있다. 나도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잠시만에 자장면집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나왔다. 나무의자에 앉아있던 텁수룩한 두 명의 남자가 들어갔다. 또 한참만에 세 사람이 나왔다. 이쪽에서 또 두 사람이 들어갔다. 나도 일어나 들어갔다.

 

들은 대로 집안은 ‘쬐끄맣다’. 세 평쯤. 네 사람씩 앉는 식탁이 네 개. 나는 방금 들어간 두 사람과 그리고 또 한 명의 낯선 분과 합석을 했다. 앉고 보니 점심을 먹으러 온 게 아니고 마치 완행열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하러 가는 사람들 같았다. 그렇게 짝을 맞추어 앉았다. 그때에, 창문에서 읽은 이문길이란 분의 부인임직한 분이 물잔과 양파, 단무지 접시를 탁자 위에 놓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벽을 훑었다.

“자장면 4,500원, 우동 5000원. 술 판매 절대 금지.”

자장면을 시켰다.

마주 앉은 분들도 그랬다.

얼굴을 마주치기가 미안해 나는 괜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신성각이 30년을 맞이 했네요. 지난 세월 오래오래 애용해 주신 고객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림니다.”

이런 글이 벽면 게시판에 붙어 있다.

“주방장 이문길 1957년생, 1973년 중국집 명성식당 입당, 1981년 신성각 이전”

이라는 주방장의 이력도 보인다.

 

그 사이 우리의 주문을 받은 그 이문길이란 분의 부인임직한 분이 주렴을 헤치고 말없이 주방에 들어갔다 나온다. 그 뒤에 이문길임직한 쉰다섯 살의 남자분이 서서 면을 만들고 있다. 그분이 이쪽으로 슬몃 고개를 돌린다. 나는 안면도 없으면서 고갯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음식점 안 네 개의 탁자에 사람이 찼다. 다 텁수룩한 사내들이다. 아마 이 동네 공장이나 우리처럼 이 주변에 직장을 둔 사람들인 모양이다. 남자들은 자장면을 먹는 일에 전념했다. 자장면을 먹기에 좋을 만큼 고개를 숙여, 너무 크지 않은 소리로 먹고 있었다. 다들 말이 없다. 대화를 나누기엔 탁자가 비좁다.

 

드디어 자장면이 내 앞에 놓였다.

나도, 자장면을 먹고 있는 다른 이들처럼 묵묵히 자장면을 먹었다. 면은 우리가 아는 둥근면이 아니다. 칼국수처럼 납작하다. 손으로 썰어선지 면의 크기도 들쭉날쭉이다. 완두콩도 없다. 면이 졸깃거리기 보다 무르다. 칼국수보다 조금 단단할 정도다. 자장면 고유의 자장면과는 다르다.

 

 

면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십여 명의 사내들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면을 먹는 모습이 어디서 본 듯 하다. 순간 장 프랑수아 밀레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이 떠오른다. 저녁 무렵 컴컴한 부엌 식탁에 둘러앉아 농부들이 구운 감자를 먹는다. 머리 위에서 비추는 희뿜한 전등불빛 말고는 모두 일을 하고 막 돌아온 거무레한 작업복이다. 그들은 그들이 오늘 하루 땀흘리며 일한 노동의 댓가로 감자를 먹고 있다. 그곳에도 대화가 없다. 피곤한 노동 끝이다. 감자를 먹지 않는다면 다음 날 아침 다시 일을 하러 나갈 수 없다. 그러니 먹는 일이 진지할 뿐이다.

 

나는 자장면 한 그릇을 먹는내내 식탁 위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그들'을 생각했다. 대체 한 끼의 ‘밥’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가. 이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 사람들은 이 한 끼보다 더 힘든 일에 시달린다. 때론 자존심을 팔고, 때론 비굴해지고, 때론 비웃음을 참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밥은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눈물이다. 나는 내 몸 안에 다 닳은 건전지를 빼고 에너지가 가득찬 새 건전지를 끼워넣는 그런 심정으로 면을 먹었다.

먹는 일이 끝나자, 나는 대뜸 일어섰다. 문밖에서 아직도 늦은 점심의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계산을 마치고 문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내가 두고 나온 빈자리를 찾아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길 위에 섰다. 올 때처럼 또 걸었다.

 

투박하고 묵묵한 두 부부.

그 부부가 만들어낸 음식. 유리창문에 씌여 있던 ‘단 한 그릇 먹어보고 눈물을 흘려 줄 음식을 내 혼신의 힘을 다 하여' 만들겠다는 그 이문길이란 분의 ‘음식’은 어떤 음식일까. 그 분이 말하는 ‘눈물을 흘려줄 음식’이란 황홀한 맛을 살려낸 음식일까. 적어도 내가 먹어본 자장면은 그게 아니었다. 허기를 채우는데서 얻게 되는 생존의 절박한 눈물이지 싶다. 그게 너무 지나친 말이라면 한 끼의 열량이 조금 모자라게 담긴, 다음 식사 때가 가까워지면 다시 배가 고파지게 하는 그런 ‘음식’이었다.

창문에 쓰여진 그분의 글은 웃어넘기려면 웃어넘기고 말 글이다. 그러나 그분처럼 초반 인생을 힘들게 사신 분의 글이라면 극단적인 경계에서 얻은 밥에 대한 깨달음이 있지 싶었다. ‘밥’ 한 그릇의 무게에서 흘려보는 눈물.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음식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칼로 기절시킨 뒤 도마위에 올려놓고 살을 뜬다. 그러고는 진행자가 그걸 한 점 입에 넣는다. 카메라가 그의 표정을 읽는다.

“뭐랄까요. 맛이 담백하고, 마치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이 부드러워요.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에요!”

그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잔인한 게 사람이다. 남의 살을 입에 넣고 그 맛을 감상한다는 것.

그런 프로그램은 음식을 음식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맛을 자극하여 음식을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음식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성업 중이다. 그런 와중에서 만난 오늘의 이 자장면은 맛에 빠진 우리들의 소비문화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사회가 밥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한, 목숨의 의미 또한 절대 존중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