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초여름에 백석의 시를 읽다

권영상 2025. 6. 23. 19:25

 

 

초여름에 백석의 시를 읽다

권영상

 

 

산山뽕닢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들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켠을 본다

 

 

잘 알려진 백석의 시 ‘산山 비’다.

백석의 토속적이고 지방색 짙은 시들과 달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촐한 서정시다. 단촐하다 하지만 이 짧은 시 안에는 꽤 무겁고 고단한 생에의 비애가 들어 있다.

산뽕잎에 비가 치자, 멧비둘기는 문득 식성이 발동한다. 비 내리면 비 내리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할 일에 마음이 다급해 먹이 사냥에 나선다. 비둘기가 이 비에 속을 채울 수 있는 거라면 나무 열매거나 아니면 자벌기 같은 생명 가진 벌레들이다.

이것을 아는 자벌기는 멧비둘기 거동에 민감하다. 멧비둘기 날자, 고개를 들고 멧비둘기 날아가는 방향을 주시한다. 다행히 살았다. 나는 다행히 살았지만, 멧비둘기가 살려면 내가 아닌 또 다른 자벌기가 죽어야 하고, 자벌기들이 모두 멧비둘기 눈을 피한다면 멧비둘기가 굶어죽어야 하는, 지금은 산비가 치기 시작하는 시각이다.

생각이 많아지는 애잔한 시다.

생명 가진 것들의 고단한 삶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아무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라면 일인데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시의 풍경이 마치 우리가 사는 풍경과 별다를 게 없기 때문에 더욱 쓸쓸하다.

 

 

이 시는 1936년에 출간한 시집 <사슴>에 실려 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태생이다.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영문과를 마치고 돌아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등단한다. 그리고 조선일보 출판국 기자가 된다.

그후 어쩐 연유인지 시를 썼는데 1935년 시 ‘정주성’을 발표하고 이듬해 시집 <사슴>을 출간한다. 당대 잘 나가던 소설가 최정희나 시인 모윤숙 노천명 등이 그와 교류했고, 그들은 그를 ‘사슴, 사슴’ 불렀다 한다. 그만큼 백석을 미남이었고, 그런 백석에겐 어쩌면 소설보다 시가 더 어울렸을지 모르겠다.

백석은 이처럼 소설로 등단했지만 다들 그를 시인으로 안다.

시집 <사슴>에는 이런 시도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모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 누이 사촌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옆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대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서북 방언이 많은 ‘여우난 곬족(族)’이라는 시다.

명절날 엄매 아배를 따라 큰집에 가는 걸 보면 시속 화자는 어린아이다. 어쩌면 그가 백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보면 이 이야기는 지금의 이야기라기보다 어두운 방 광주리에 담겨있는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보는 게 옳겠다.

명절에 큰집엘 가면 고모 삼촌 식구들도 만나고,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떡도 먹고, 숟가락 빼면 고모 삼촌네 또래 아이들과 숨국막질이며 시집장가 놀음도 한다.

밤이 깊으면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아랫간에 모여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 하고 제비손이구손이 놀이를 새벽닭이 울 때까지 한다. 그러느라 부엌에서 무징게미국 끓이는 냄새가 무럭무럭 날 때까지 늦잠을 잔다.

 

 

명절날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누구누구가 모이는지, 모여선 뭔 음식을 하고 먹는지, 뭔 놀음을 하는지, 뭔 가축을 키우는지, 집의 구조며 아이 어른 차지하는 방이며, 또한 마마 자국나고 베 짜는 문화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평안도 정주의 어느 산골짜기 마을의 풍속과 당시 실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토속냄새가 풍기는 시다.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 인정스럽게, 한번 명절에 만나면 또 만나지 않고는 못배기게 마치 겹겹이 끌여입고 앉은 옷처럼 푸근하고 따뜻하고, 건들면 옷의 무게에 그만 넘어질 듯 풍성한 말로 채워진, 인정 넘치는 시다.

시에 이마만한 서사를 집어넣는 힘은 백석이 처음부터 소설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거와는 좀 다른 이런 시도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을 안다는 이들이라면 다 아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나타샤’라는 이국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걸 가지고 이 시에서 모더니즘을 읽으려는 이들도 있다.

백석이 사는 어느 곳에 지금 눈이 내린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푹푹 눈이 내리고 있다. 그런 눈 내리는 밤에 화자는 어쩐 일인지 나타샤를 사랑하면서도 쓸쓸해 홀로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는 누구인가. 백석이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니 톨스토이의 소설 속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면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살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여인일 수도 있겠다. 몇 번인가 청혼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한 ‘그녀’가 아닐까. 떠나보낸 여인이지만 마음 안에 심어두고 사는 그녀. 그녀인 듯 하다. 그녀가 아니라면 왜 하필 나타샤를 데리고 깊은 산골 마가리에 가 살기를 바랄까.

 

 

눈이 푹푹 내리는 데도 그는 마음이 허전하다. 잘 났으면서도 태생이 슬퍼 사랑을 이루지 못 하는,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싫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 속에 뭉쳐있는 분노가 여과없이 민낯으로 드러난다. 이 시로 보아 그는 분명 지금 세상한테 지고 있다.(그 세상을 굳이 강점기의 일제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

오갈 데 없이 푹푹 눈 내리는 밤, 시인은 밤눈을 내다보며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으로 위안받는다. 시인에게는 그런 아픈 상처가 있어 눈이 내리면 쓸쓸하다.

해방이 되어도 백석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쪽에 머물게 된 이유를 읽는 것 같아,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런 백석을 북에다가 홀로 두고 우리가 1996년까지 살았다는 게 좀 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