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천성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천성
권영상
시골에 집을 두고 9년을 지내면서도 그간 사다리 없이 살았다.
사다리가 뭣에 필요한데? 그게 사다리를 사지 않으려는 미련한 나의 방어막이었다. 하긴 손바닥만한 텃밭에 토마토 심고 무 심고 사는데 사다리가 대체 무엇에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기둥과 추녀에 방부용 오일 스테인을 칠할 때뿐이다. 그 일은 꼭 해야 되는 일이다. 방부 뿐 아니라 방수, 방충 효과까지 있으니 그럴 때면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일도 3년에 한 번씩 하는 작업이다.
근데 그 3년을 용케 발명해 내는 이가 있다. 한 시간 반 거리에 사는 막내조카다. 직장에 다니는 그는 뭘 만들고 고치고 조립하고 밝혀내는 걸 좋아한다. 아뭇소리 안 하는데도 제가 알아서 ‘페인트칠할 때 됐잖아요.’ 하고는 제 차에 사다리를 싣고 와 뚝딱 칠해주고 간다.
그가 직장관계로 그 일을 못할 때가 있었다.
옆집 수원아저씨와 대화중에 페인트 칠 이야기를 했다. 그날 저녁 무렵이다. 수원아저씨가 요즘 사다리 쓸 일 없다며 자신의 집 사다리를 우리 마당에 놓고 갔다.
그럴 때마다 그런 나를 보고 못 참는 분이 한 분 계신다. 아내다.
왜 사다리 하나 못 사가지고 이웃사람들 불편하게 하냐며 역성을 낸다.
사다리 하나 얼마 한다고 그러느냐! 그거 사기 그렇게 귀찮으면 쇼핑몰에 주문해 봐라! 보관할 데 없으면 뒤란 벽에 세워두든지! 하며 잔소리다.
아내가 내게서 느끼는 불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몽키 스패너 종류별로 좀 사두고, 대패도 좀 좋은 걸로 하나 사고, 드릴도 좀 사놓고 쓰자고 성화를 대는 게 벌써 5,6년째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변한 게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구. 좀 불편하게 사는 것도 좋잖아.”
대체로 나는 구제불능의 이런 스타일이다.
여기서만이 아니다. 서울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안에 책이 넘쳐나는데도 서가를 사다가 번듯하게 정리하기보다 그냥 쌓아두는 편이다. 컴퓨터도 10년을 써 작동이 느린 편인데도 느리면 느린 대로 그냥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걸 교체하면 교체한 컴퓨터는 쓰레기가 되고, 사다리를 사면 사다리는 또 내 소유의 짐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지지난해 늦가을이다.
몹시 비 내리던 날, 집을 둘러보던 내 눈에 화급한 일이 들어왔다. 추녀 물받이가 빗물로 넘쳐나고 있었다. 별안간에 물받이가 터져날 것 같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차를 몰고 읍내에 나가 사다리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사다리를 놓고 추녀에 올라가 봤다. 창 밖에 선 산딸나무 가을 낙엽이 물받이에 떨어져 빗물 홈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러니 빗물이 길을 잃고 출렁출렁 넘치고 있었던 거다.
“이참에 물받이가 확 떨어져 내렸어야 했었는데…….”
불편한 대로 그냥 눌러 사는 내 천성을 아내가 꼬집었다.
사라, 사라. 하는 이륜 수레도 아직 못 사고 있다. 시골 일이란 감자를 캐면 감자를, 배추를 뽑으면 배추를, 유기농 거름을 사면 거름포대를 들어 나르는 일들이다. 오랜 시골일로 허리가 안 좋은데도 나는 아직도 이륜 수레를 못 사고 있다. 사면 또 짐이 될 것 같아 그런다.
나는 그렇다 하더라고 불편한 쪽은 함께 사는 아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무던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천성의 불편함을 종종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