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다르게 맞추어진 꽃시계
저마다 다르게 맞추어진 꽃시계
권영상
소리 없이 지나가는 2월이라지만 바빴습니다. 그러느라 3월 달력을 넘겨놓고 안성으로 내려와 나무마다 입혀놓았던 짚싸개를 벗겼습니다. 느낌은 봄이지만 자두나무며 매실나무, 모과나무 가지에 봄은 아직 멀었습니다.
지난해 구덩이에 묻어놓은 파를 꺼내려고 보니 새로 올라오는 파 끝에 파꽃몽오리가 맺혔습니다. 조만간 파꽃시계에 맞추어 꽃을 피우겠지요. 쪼그려 앉아 파를 다듬다 보니 쬐끔한 풀꽃 하나가 밭가생이 마른 풀 사이에 언뜻 보입니다. 봄까치풀이네요. 겨울 볕 중에서도 파란 봄실을 뽑아 꽃을 지어입고 나왔습니다. 나는 ‘애썼다.’ 그 말을 해주었지요. 지난겨울이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작은 풀씨들에겐 모진 계절이었을 테지요.
봄까치풀꽃은 거기 한군데만 피어있는 게 아닙니다. 요기조기 마른 풀 사이로 또렷이 보입니다. 이 밭가생이로 괭이를 들고 몇 차례나 다녔는데, 그때는 안 보이던 것이 이제야 똑똑히 보이네요. 냉이도 꽃을 피우고 있네요. 먼지만치 작은 꽃을 꽃대 끝에 물고 작은 바람에도 온몸으로 흔들리고 있네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보지 않으면 안 보일 만큼 작은 꽃들도 처음이 어렵지 한번 보고나면 쉽게 눈에 띄지요. 밭고랑 냉이들은 그들에 비하연 살이 올라 실하지만 아직 꽃 필 때가 아닌가 봅니다.
봄까지풀과 냉이는 봄을 느끼지만 다른 풀들에게 봄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같은 대지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봄시계의 시간은 다 다릅니다.
지난 2월 중순쯤이었지요. 고향 친구들이 때 아닌 봄을 에스엔에스에 올렸습니다. 그때가 삼동이었는데 눈 속에 핀 노란 복수초꽃을 찍어 올렸고, 매화꽃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춥고 새파란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마다 정결하게 꽃 피우고 선 매화나무를 보며 동해안의 봄을 부러워했습니다.
집둘레에 서 있는 우리집 매화나무는 봄이 느립니다. 어제 아침 우면산 샘물터에서 본 두 그루의 매화나무는 우리 것보다 조금 이릅니다. 한두 송이 피는 걸 보았으니까요. 서 있는 자리가 달라도 그렇지만 같은 자리여도 볕바른 곳과 음지가 다르고, 풀과 나무가 느끼는 꽃시계가 다르겠지요.
아직 좀 더 있어야 파꽃이 피고, 좀 더 있어야 매화가 피고 자두꽃이 피고, 그보다 또 좀 더 있어야 뜰보리수와 모과가 꽃 피지요. 누가 저들 손목에 저마다 다른 꽃시계를 채워놓았을까요. 생각할수록 참 다행한 일입니다. 한날 한 시에 똑 같이 꽃 피고, 똑 같이 꽃 진다면 그건 또 얼마나 허무한 일일까요. 초봄에서 시작하여 늦봄까지 모두 제 시간에 맞는 꽃을 보여주어 우리는 단 하루도 꽃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가끔 시계가게 앞을 지날 때면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시계들을 바라봅니다. 시계마다 시곗바늘 위치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고 똑 같은 시각을 정확하게 똑 같이 가리킨다면 우리는 그 일치성에 질려 금방 돌아설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그런 심리를 알고 시계가게 주인이 일부러 시간을 다르게 해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사람에게도 일률적인 성장시계가 주어진다면 그건 또 얼마나 가혹할까요. 그러나 다행히도 생명체는 저마다 다른 성장시계를 받아왔습니다. 누구는 수셈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좀 빠르고 누구는 좀 느리고, 세상을 이해하고 깨닫는 힘도 다 다른 시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시계로 자신의 시간과 빛깔에 맞는 꽃을 피우며 사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