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충전한다
나를 충전한다
권영상
땅을 떠밀고 호박씨가 올라온다. 연두색 떡잎을 마주 편다. 충전판을 닮았다. 햇빛을 받으면서 떡잎은 점점 초록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떡잎은 지금 햇빛 충전 중이다. 저렇게 햇빛을 충전하여 호박씨에서 호박순으로 몸 바꾸기를 하고 있다. 이 순간은 사뭇 위중하다. 애벌레들의 우화처럼 화려하기도 하지만 위험도 따른다. 머뭇거리거나 상처를 받으면 그걸로 생은 끝이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멈춘다. 해마다 보아오는 일이다. 그러나 햇빛 충전에 성공한다면 그에겐 아름다운 여름과 가을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을 사는 사람 역시 충전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중학교를 마치고 나는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배회했다. 어머니의 장기간 우환으로 오래도록 실의에 빠졌다. 싸우고, 술 마시고, 떠돌고, 일 없이 놀고..... 정상적으로 써야할 힘을 소모적인 일에 쓰느라 나를 모두 방전해버렸다.
그 당시 내게는 다시 일어설 충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겐 그럴 힘이 없었다. 주위 분들이 진학을 권유하고 일자리를 구해주려 했지만 나는 돌아섰다. 나중에 뭘 먹고 사려고 그러느냐며 나를 탓했지만 내게는 아무 의욕이 없었다. 그때, 고향의 호숫가에서 넝마주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았지만 나와 달리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하루치 일을 하면 그걸로 그와 술을 다 마셔버렸다. 어느 날, 나는 그와 싸웠다. 술 한 잔 살 줄 모른다는 내 빈정거림 때문이다. 그가 웃옷을 벗어 땅바닥에 메어치며 소리쳤다.
“너는 술 마시기 위해 일하지만 나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일한다구!”
그는 그렇게 맨 몸으로 나를 떠났다.
그 순간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술에 취했음에도 알았다. 힘들게 일해도 동생 약값을 대지 못해 어린 동생을 잃을 뻔 한 적이 있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일 이후, 나는 나의 지루한 일상을 털고 일어섰다. 그의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내 몸이 감전되는 것처럼 아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나를 충전시켰던 거다. 비로소 나는 스스로 걸어 진학의 길로 들어섰다. 3년만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가 내게 던져주고 간 말을 잊지 않았다. 방전을 느낄 때마다 나는 충전의 근원을 그에게서 찾았다.
충전엔 꼭 용량 큰 배터리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지나쳐 들은 사소한 말 한 마디가, 풀잎을 스치는 바람이, 얼핏 비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무 의미 없는 듯 한 농담이, 누군가의 조롱이 나를 충전한다.
우리 몸은 그렇게 충전되어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내 힘만으로 이 험난한 파도를 헤쳐 가는 듯 해도 그게 아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나를 둘러싼 타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수시로 나를 충전하며 산다. 큰 충전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작은 충전으로 그때그때 자신을 새롭고 푸르게 만들어가는 기술도 필요하다.
한 사나흘 휴가를 얻어 쉴 때나 여행 중에 번번이 느끼는 게 있다. 이렇게 놀다 내 감각을 몽땅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실의에 빠져있을 때도 그렇다. 실제로 그런 경우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힘들어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시 한 구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멘트에서, 힘든 삽질에서 충전 받으려 애쓴다.
오늘은 텃밭 호박 떡잎을 본다. 볼수록 태양열 충전판을 닮았다. 어쩌면 태양열 충전도 어느 과학자가 이 호박 떡잎에서 그 모델을 차용했을지 모른다. 나는 내 방식대로 호박 떡잎이 씨앗에서 덩굴로 변태하는, 위험하나 화려한 충전법을 배운다.